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한국,바람(désir)의 문화
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marie Gustave Le Clézio) ㅣ 프랑스 소설가,
1940년생.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 『조서』 『열병』 『황금 물고기』 『사막』 『혁명』 등
편집자 주 ㅣ 재단과 프랑스대사관, 교보문고, 교보생명은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건축, 문학, 의학, IT, 우주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프랑스 석학·저명 인사를 만나 직접 소통하며 프랑스 문화 예술을 폭넓고 깊이 있게 접할 수 있는 France" 프랑스 석학 초청 연속 강연>을 개최하고 있다. 6월 1일(수) 진행된 세 번째 강연에는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는 작가’, ‘새로운 시작과 시적 모험, 관능적 환희의 작가이자, 주류 문명을 넘어 인간성 탐구에 몰두한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가 강연자로 나서 한국 문학과 문화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시하였다. 강연원고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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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위대한 힘
내게로 오라 그대 이마에 입맞추리
불꽃처럼 가벼운 그대
그대는 불꽃의 모든 고통,
모든 빛과 뜨거움을 가졌으니
- 아폴리네르(Apollinaire), 『칼리그람(Calligrammes)』
더 이상 욕망할 게 없다는 이는 불행할지니
-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신 엘로이즈(La Nouvelle Héloïse)』
나의 조국인 프랑스와 한국, 두 나라 사이의 거리와 친근함, 서로에 대한 오해와 호기심에 이르기까지, 130년을 이어온 양국 간의 외교와 경제, 그리고 문화 교류의 역사를되짚어 보려는 이 때, 내 머리 속에는 ‘바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선 바람이라는 단어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해 보고자 한다.프랑스어로 바람을 의미하는 ‘désir’는 많은 암시적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리비도와 관련된 의미들로, 비교적 전통적인, 즉 경제적인 맥락으로 사용되는 암시적 의미들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복합적인 의미들로,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이를테면 ‘욕망의 대상’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암시적 의미들이 있다. 프랑스어 역사 사전에 따르면 ‘désir’의 어원은 ‘désirer’라는 동사이며, 이는 결핍이나 박탈을 의미하는 접두사 ‘de’와 라틴어 동사 ‘siderare’가 결합된 것이다. ‘siderare’에서 나온 프랑스어 동사 ‘sidérer’는 놀라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라틴어의 ‘siderare’는 원래 별을 관찰한다는 의미로, 점성술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무언가를 ‘désirer’ 즉 욕망하는 사람은 별을 보지 못하는 사람, 본래의 의미이던 비유적 의미이던, 하늘을 뺏긴 사람을 가리켰고, 별들을 통해 신이 보여주는 운명을 읽지 못하는 상황을 뜻했다. 그런 사람은 ‘de-sidération’, 즉 별을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 무지한 사람, 그래서 간절한 바람만이 남은 사람을 의미했다.물론 이러한 어원은 약간 신화 같은 부분이 있다. 사실 언어에 대한 학문들이 대부분 그런 편이다. 하지만 이 어원은 ‘make sense’ 라는 영어 표현처럼,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필자의 발표는 바로 이 어원을 기반으로 하며, ‘바람의 문화’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재미있는 어원에 관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불어의 ‘désir’가 한국어에서는 ‘바람’이며, 이 단어는 불어오는 ‘바람’과 동음이의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욕망은 바람처럼 거칠고, 격렬하며, 불현듯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유용하고 영감을 준다는 것이 바로 모든 문학이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니던가. 특히 프랑스 현대 문학과 한국전 이후의 한국 문학이 그렇다. 또한 한국과 프랑스의 영화를 비롯한다른 문화적 장르들은 물론 사회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문화에 대한 역사적 측면, 그리고 새로운 언어의 창조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재 소설에서 다음 회를 기약하며 사용하는 문구처럼, 앞날에 대한 예단은 금물이다.
문학은 전통적으로 사랑에 대한 바람, 무한한 존재에 대한 바람, 이상 세계에 대한 바람 등 다양한 바람을 그려왔다. 아벨라르(Abélard)와 엘로이즈(Héloïse)의 전설처럼 충족되지 않은 바람을 그리기도 하고, 오노레 뒤르페(Honoré d’Urfé)가 1610년부터 1625년까지 17권으로 써낸 셀라동(Céladon)과 아스트레(Astrée)의 사랑 이야기처럼 한 평생이, 작품 전체가 바람을 쫓는 모험으로 점철된 경우도 있다.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아스트레(Astrée)』는 오늘날 찾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당시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춘향을 노래한 익명의 긴가락도 욕망을 얘기하고 있다. 춘향은 한국 고전문학에 나오는 대표적 여성 중 하나이며, 작가 황석영은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뒤틀어 『심청』과 『바리데기』를 집필한 바 있다.
동양에서처럼 유럽에도 사랑의 욕망이 갖는 집착, 강박, 그리고 비극을 보여주는 수많은 소설들이 있다. 이런 작품들을 읽을 때는 행간의 의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프랑스 고전 문학 중 하나인 『클레브 공작부인(Princesse de Clèves)』은 라파예트 부인(Madame Lafayette)의 작품으로 억눌린 욕망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욕망의 단념을 권유하며 열정의 위험성, 사회적 관습에 위배되는 사랑의 패악성을 경고하고 있다. 클레브 공작부인이 사랑을 포기한 것은 고귀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기득권을 잃고 평민 계급으로 추락하는 것이 두려워 사회적 지위가 요구하는 희생을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특별한 여성이 있다. 리옹 출신의 여류시인 루이즈 라베(Louise Labé)는 페트라르카에게서 영감을 받아 직설적인 언어로 자신의 욕망을 노래했다(직설적이라 해도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 시의 갈리아어와 비교하면 그지없이 우아하다).
살아있다 죽어간다 불 타 오르다 익사한다
추위에 덜덜거리는 내 몸 속 치솟는 뜨거운 혈
내게 너무 달콤한 삶, 내게 또한 가혹해라
기쁨 뒤섞인 큰 고통이 내 안에 여럿 있네
갑자기 웃다가 금세 눈물 짓고
기쁨 속에 잠긴 채 깊은 고통 견디며 사네
스러져간 내 행복 영원히 그대로고
타들어가는 이 내 몸은 초록으로 피어나네
이처럼 사랑은 변덕스레 날 이끄니
내 고통 더 깊어졌다 생각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 고통을 벗어났네
- 「루이즈 라베의 소네트 세 편」, 최권행 역
루이즈 라베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그녀의 연인이자 당시의 저명한 시인인 모리스 세브(Maurice Scève)의 창작물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이즈 라베의시가 당시의 그 어떤 프랑스 작품보다도 강한 힘과 예술성으로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 특히 한국문학에서도 여성 시문학의 태동기, 즉 사랑의 감정이 창작의 동력이 된 여성문학 작품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가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크게 작용했던 조선 시대에 강릉 출신의 허난설헌은 탁월한 재능과 대담함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웃 나라 중국에서도이 통제된 자유를 통해서 침묵에서 벗어나려 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예는 한성제의 총애를 받았던 반첩여(班婕妤)라는 시인으로 그는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고통과 앞으로 견뎌내야 할 고독의 두려움을 부채에 써내려 갔다.
제나라 비단을 새로 자르니
서리나 눈마냥 희고 깨끗하다.
마름질해 합환선을 만드니
고르게 둥근 것이 밝은 달과 같구나.
님의 소매 속에 들고 나며
흔들릴 때마다 미풍을 일으키지만
늘 두려운 것은 가을이 다가와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면
상자 속에 버려져
사랑을 향한 길이 영원히 사라짐이라
- 반첩여, 「원가행(怨歌行)」
한국이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바람의 표현은 여성들에게 자유의 쟁취였고 시적 힘의 확인이었다. 당시 문단은 주로 가부장적 문화와 국교, 그리고 남성 문인들의 권위가 지배하고 있었다.
인류애적인 투쟁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프랑스 참여 문학은 조종을 울렸다. 하지만 바로 이때한국에서는 다른 무기를 이용해, 꺾였던 참여 문학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폭력의 시대가 낳은 이 문학에서 발견되는 것은 역사 의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되찾고 이해하려는 바람이다
이제 다른 바람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20세기 초 당시의 시대 정신에 반기를 들고 욕망이라는 개념을 재해석했다. 안락한 회의와 경제적 이기주의가 양차 대전 사이의 유럽을 점령한 시대였다. 식민지 정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제국주의 전쟁은 알제리, 모로코와 이른바‘강화조약’을 맺는 것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이 파렴치한 알헤시라스(Algeciras) 의정서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프랑스, 영국, 독일이 서로를 견제하며 술탄이 지배했던 왕국들을 마음대로 갈라놓은 사건이다. 프랑스나 영국과는 반대의 입장이지만 한국 또한 식민주의를 겪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극단적 식민정책을 펼치며 한국의 문화, 언어, 그리고 이름까지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독립 운동이 전 세계로 번져나가기 전 자유와 정의에 대한 바람은 의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득했다. 이는 단지 정치적 투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인을 비롯해 많은 민족들이 바람의 라틴어 어원이 의미하듯, 별을 잃어버린 처지가 된 것이었다. 1941년 윤동주 시인은「별 헤는 밤」을 썼고, 결국 일본에 희생당하고 만다. 이 시의 전문을 여기 옮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는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랜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는 위대한 르네 샤르(René Char), 아라공(Aragon), 엘뤼아르(Eluard),부드러운 막스 자콥(Max Jacob) 등 투쟁 작가들이 자유와 삶의 기쁨 그리고 희망을 외쳤다. 보편적 시를 꿈꿨던 막스 자콥은 1944년 당시 독일의 앞잡이였던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드랑시(Drancy)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끝없는 평원에 울려퍼지는 메아리의 메아리
그리고 이민자들의 노래 소리!
옛날 그 노래 가락은 어디로 갔는가?
그토록 불러댔던 그 노래 가락은 어디 있는가?
가지런한 이가 아름답던 소녀들은 어디 있는가?
노래로 사랑을 붙들던 소녀들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나의 노래는? 바라노니, 나를 기억해 주길!
- 막스 자콥, 「중앙 실험실(Laboratoire central)」
문학은 이렇게 자유를 향한 비상을 노래했다. 속박과 치욕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렇지만 허망한 몸짓이기도 했다. 그 시각 유럽에서처럼 아프리카, 인도, 인도차이나에서 피지배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담론이 일어났
다. 다른 언어들이 고개를 들었다. 한국을 둘로 나눈 동족상잔의 6·25전쟁은 프랑스어로는 번역
할 수 없는 감정, ‘한’과 ‘정’ 사이의 어떤 감정을 형성했다. 그것은 씁쓸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서로 나누고 용서하는 감정이다. 인류애적인 투쟁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프랑스 참여 문학은 조종을 울렸다. 하지만 바로 이때 한국에서는 다른 무기를 이용해, 꺾였던 참여 문학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폭력의 시대가 낳은 이 문학에서 발견되는 것은 역사 의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되찾고 이해하려는 바람이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한씨 연대기」 등은 이러한 ‘한’과 ‘정’의 감정을 잘 보여준다. 이 감정은 전쟁이나 정치적 투쟁과 관계가 깊다. 멀지 않은 과거와 자신의 삶을 통해 전후의 감정, 제주 4·3 사건의 회한을 이야기하고 있는 어떤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 작가들은 기억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복수의 유혹은 저버리고자 한다. 이들에게 바람은 순수함이 사라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향수이며,용서가 가능한 것을 용서하려는 의지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의 작가 이승우 또한 통한의 세대, 정치 참여의 세대이며,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유럽이나 영미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 『이방인』의 뫼르소나 『구토』의 로캉탱, 혹은 스타인벡과 헤밍웨이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사실 너머로 솟아오르지 않으며, 다른 이들과 비슷한 주체, 다시 말해 상이 용사나 부상 당한 군인처럼, 악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공모자일 뿐이다.
전후 세대는 이렇게 전쟁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치유 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전쟁의 폭력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메울 수 없는 공허로 시달린다. 이러한 폭력을 황지우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관 번호 104 : 실현 불가능한 이 증오가 실현 가능한 사랑이 될 때까지
검시번호 A-13 : 그 비가시적 사랑이 비로소 가시적 부활이 될 때까지
묘지 번호 115 :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이름 없는 그대여 이름없는 그대여
- 황지우, 「호명」
분명 여기서 한국의 젊은 작가와 영화인들, 그리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작가와 영화인들 사이에 거리가 느껴진다(왜냐하면 한국은 아일랜드처럼 전쟁의 폭력이 깊은 상처의 뿌리로 남은 나라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의 독일처럼 분단된 나라와 더 많은 공감대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공허, 분단의 폭력, 한의 정서는 현대 사회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 폭력성 위에 도시화와 출세 지향의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 개인이 더 이상 지향점을 찾지 못하는 사회의 가혹함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이청준의 『예언자』, 익살스러운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달려라 아비」는 인간과 현실의 부정교합이 한국 문학을 지배하는 주제임을 잘 보여준다. 김기덕과 박찬욱의 잔인한 날 것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미학과 정체성의 문제에 천착하는 프랑스 문학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전쟁의 경험과 경제적 난폭함이 한국에 좀 더 강렬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여성적 글쓰기가 영화와 문학에서 모두 새로운 방식을 가져올 것이다. 이정향 감독, 소설가이기도 한 이창동 감독은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한국 영화의 인간적인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가족 내의 소통과 관계를 해부한 내밀한 문학의 길을 열었다. 그 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거리를 두고 재해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작가들은 한국의 오래된 민족적 감정인 한이나 정을 뒤로하고, 대신 새로운 현실, 더 복잡하면서도 더 비밀스러운 세계, 현대 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바람의 여러 가지 면을 살펴보았다. 서울이라는 현대적 도시는 다양한 바람이 분출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광대한 면적, 전국 곳곳에서 온 다양한 주민들, 증가 추세의 이민 사회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경험과 이야기들, 끊임 없는 변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치 상반된 바람들이 잔뜩 섞여 있는 커다란 그릇과도 같다.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의 『밀 판매장(The Pit)』이 잘 보여주듯 파리, 런던, 뉴욕 같은 다른 대도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바람의 분출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은 이곳 서울일 것이다. 아마도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생생한 곳이기에, 그리고 산산조각 난 거울처럼 완전히 부서져 모든 것을 다시 만들고 세워야 했던 이곳이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세상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윤곽이 잡혀가는 미완성의 얼굴처럼.
번역 : 조은미(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