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글 김해양 ㅣ 김학철의 외아들. 1948년생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개최되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 저의 부친 김학철을 회상하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1977년 겨울, 저는 10년 수감생활을 마치고 만기 출옥하시는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중국 북방 추리구(秋梨溝)라는 작은 산간마을에 자리 잡은 감옥에 홀로 찾아갔습니다.
찬란한 겨울 햇살이 목발을 짚고 외다리로 감옥 문을 나서는 아버지를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환한 웃음으로 외아들인 저를,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 저를 큰소리로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한 손에는 감방에서 입으시던 옷 보따리를 들고, 한 손으로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기차역으로 가는 길가에 나섰습니다. 당시 기차역까지 10리길인데 포장도 안 된 흙길인데다가 버스도 없는 산간오지였습니다. 다행히 기차역으로 가는 평판마차가 하나 있어 사정을 하니 주인이 흔쾌히 태워주겠다 허락하였습니다. 누굴 앉혀주고 돈을 받는 개념조차 없는 세월이어서 무임승차였습니다. 평판마차란 두 바퀴 위에 달랑 넓은 판자만 설치된 간이마차입니다. 마차 위에 외다리를 꼬고 앉아계시는 아버지는 무척 즐거우신 눈빛이었습니다. 물결처럼 밀려왔다 물결처럼 밀려가는 산언덕들을 눈을 가늘게 뜨시고 바라보심이 십 년 만에 느끼는 자유가 마냥 몸에 스며드는 겨울 햇볕과도 같이 따스하신 듯 했습니다. 문득 아버지가 항일전장터에서 쓰신 시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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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의 이 태양이 그토록 바라시던 그 태양인가요?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란 파국적 난동시기 모택동과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꿈꾸는 당시 지식인들을 묘사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쓴 ‘죄’로 작가에게 그토록 소중한 10년이란 세월동안 붓을 빼앗긴 채 철창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문자옥(文字獄)이란 고대로부터 존속해 왔지만 20세기는 문명이 그래도 꽤나 진화한 시대가 아닙니까? 다행히 그 10년도 꾸준히 또 말없이 흘러왔습니다.
아버지는 만기출옥의 그 길 위에서 항전의 포화 속에 희생한 전우들을 떠올렸습니다. 석정
김학무 호철명 유신 마덕산 손일봉 왕현순 한청도……. 태항산 항일전투장의 흙속에 묻힌 수십명 전우들이 이 따스한 겨울 햇빛과 함께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잊혀지고 남과 북 모두에 외면당하는 외로운 영혼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마덕산의 죽음에 대해 더더욱 잊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태항산 호가장 대일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처음 수감된 곳은 태항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석가장 일본영사관 구치소였습니다. 당시 조선인 포로들은 일제가 ‘국민’ 대우를 하여 팔로군 포로수용소가 아닌 영사관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으로 마덕산이 잡혀왔습니다. 한데 몇 주 후 마덕산은 갑자기 군사 정탐꾼으로 몰려 북경 형장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날 오전, 마덕산은 아버지께서 갇힌 감방을 지나며 구겨진 쪽지 하나를 던져 넣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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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던져 넣고 갔습니다. 쪽지에는 “학철아, 원수를 갚아다오. 유빈이 때문에 체포되고 또 총살당한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당시 전쟁포로와 달리 군사 정탐은 총살 감인데 부대인원을 모집하러 북경으로 온 마덕산을 의용군 ‘전우’인 일제특무 유빈이 밀고하여 체포하고, 또 심문 과정에서 군사 정탐으로 모함해 총살한 것입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유빈(일명 신용순)은 광복후 일본에서 서울로 귀국하여 항일투사 행세를 하며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그 쪽지를 일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조국과 가족을 멀리 떠나 항전의 태항산에 묻힌 그들에대한 사랑과 우정으로 아버지는 훗날 장편소설과 회고록 『격정시대』, 『항전별곡』을 잉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태항산 호가장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일본군에 생포되어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압송되던 또 다른 여정을 연상하였습니다. 당시 일제 강점 하에는 중국 북경에서 부산까지 직행열차가 있었습니다. 북경 치엔먼(前門) 정거장에서 중국인들은 두 일본 헌병의 압송 하에 한쪽 다리에 총상을 맞아 양 쪽에 목발을 짚고 기차에 오르는 젊은 조선인 군관을 동정의 눈길로 배웅하였습니다. 총상이 아물지 않은 압송길이 고달프기는 하지만 기쁨도 있었습니다.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를 찾아 일제 강점 하의 조선을 탈출하며 이별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미리 전보를 받은 어머니가 누이동생을 데리고 열차에 오른 것입니다. 멀리 타향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떠난 아들이 다리에 총상을 맞고 일본 헌병에게 압송되어 가는 모습을 본 저의 할머니는 평소의 그 강한 의지와 성격으로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왕련 장군의 부인이 된 누이동생은 오빠를 안고 눈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농민 출신인 두 일본 헌병이 조선인 부상병에 동정심이 있어 그들의 만남에 자리를 비켜주고 또한 기차에서 만날 수 있도록 북경에서 미리 가족에게 전보도 쳐주었습니다. 헌데 아버지께 뜻밖의 일은 부산까지 동행할 줄 알았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수원역에서 부랴부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일제가 패망하여 나가사키 감옥에서 풀려나와 조국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돈이 없어 그 기차표 두 장도 겨우 구입한 신세였습니다.
북간도의 겨울 바람이 이렇게도 훈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십 년 동안 감옥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 하지 못한 것을 한풀이하시듯 말을 이었습니다.
“참, 내가 처음 갇힌 나가사키 감옥이 미군 원자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헌데 하늘이 나를 살렸지. 그 감옥에 수감자가 너무 많아 일부분이 시교 분소로 이송되었는데 그 중에 내가 낀 거야. 아니면 너도 나도 오늘 이 마차 신세를 못 지게 될 뻔 했지” 하며 통쾌하게 소리 내어 웃으셨습니다. 중국인 마차 몰이꾼도 우리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같이 웃어 주었습니다. “나가사키 감옥에 갔을 때 총 맞은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는 것이야. 옥장이 천황폐하를 다시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전향서를 써야 치료해주겠다고 했지. 몇 해를 상처에서 고름이 흐르고 젓가락으로 구더기를 주어내며 사는 신세였는데 파상풍에 안 걸린 것도 참 기적이지. 이년 반이 지났는데 옥장이 바뀌었어. 그래서 치료는 포기하고 다리만 잘라달라고 신소하니 새 옥장이 선심을 베풀어 잘라주었지. 그 다리는 아직도 나가사키 감옥 뒤뜰의 무연고 묘지에 묻혀있을 거야” 하며 씁쓸히 눈에 덮인 먼 산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였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생을 마감하며 남기신 임종유언입니다.
어느덧 추리구 정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기차에서 먹으려고 사간 과자보따리를 기어코 사양하는 마차몰이꾼에게 억지로 안기고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 2016년 3월 17일 중국 연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