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글 박상 ㅣ 소설가. 1972년생
소설 『이원식 씨의 타격폼』 『말이 되냐』 『15번 진짜 안 와』 『예테보리 쌍쌍바』 등
나는 고동치는 눈물을 뜨겁게 흘렸다.그러나 글도 못 쓰는 주제에 문학외적인 요인으로 찌그러질 수는 없었다. 또한 인간들을 경멸할 수도 없었다. 시끄러운 인간들이 없다면 혹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읽어줄 사람도 사라지는 것이다.
요즘 글이 너무 안 써졌다. 다각도로 원인을 분석해보니 입을 바지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당장 집 근처 아울렛에 갔다. 개성을 깜빡한 것투성이였는데 그나마 독특한 바지를 딱 하나 발견했다. 그때 옆에서 꼬마애가 나타나 꾸에에에 울어재꼈다.
분위기 좋았는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울음소리가 하도 날카로워 구매욕이 썰려나갔다. 쇼핑을 포기했다. 엄마는 날 키울 때 밖에서 칭얼거리거나 떼쓰지 않아서 참 편했다고 했다. 물론 다 큰 다음에 돈 못 벌어서 뒤늦게 속 썩이는 중이지만.
어쨌든 나는 바지도 없고, 시끄러운 소리도 못 참는 사람이 되었다. 기구한 팔자다. 소음 때문에 지난 일년 동안 이사를 세 번 다녔다. 처음엔 집 앞에 포장마차가 생기더니, 날마다 깽판 치는 소리가 나서 이사했다. 그래서 술집이 전혀 없는 동네를 골랐다. 그런데 어떤 주정뱅이가 날마다 집 앞 길바닥에서 술 진상을 부렸다. 경찰을 불러도 안 잡아가고, 오히려 날 신고해? 하며 더욱 발광했다. 글도 못 쓰는 주제에 사람을 두들겨 팰 수는 없었다. 이사했다.
이번엔 더욱 잘 따져보고 옮겼다. 집 앞에 주유소가 있었지만 온화한 인상의 남자가 가족끼리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사하자마자 주유소 주인이 냅다바뀌었다. 새로 온 놈은 ‘3번 주유기 2만원 주유 시작합니다’ 하는 기계 목소리를 틀었다. 자다 깰 정도의 미친 음량이었다.
그걸 왜 이 동네 주민들이 다 알아야 하지? 항의해도 소용없었고, 데시벨을 측정해 구청에 신고해도 소용없었고, 급기야 거지같은 음악까지 크게 틀어재꼈다. 그 무식함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글도 못 쓰는 주제에 주유소를 습격할 수는 없지 않는가. 또 이사했다.
이사하느라 보증금은 자꾸 줄고, 빚은 자꾸 늘었다. 글은 더욱 안 써졌고, 바지 살 돈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하는 남자이기 싫었다. 이번엔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듯 했다. 계약 전에 낮이고 밤이고 가서 소음을 살폈다.
그런데 이사하고 나니, 집 근처에 있던 전자제품 가게가 내가 딱 싫어하는 유형의 질질 짜는 음악을 하루 종일 틀어대기 시작했다. 아아 세상에, 이건 왜지? 약 올라 죽으라는 설정인가?
전자제품 가게에 전화해 그런 짓은 손님을 끄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항의하면 하루만 줄였다가 다음 날 또 볼륨을 높였다. 그 붕어 같은 기억력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운명의 신이 방음부스 외판 알바라도 뛰는 거니.
나는 고동치는 눈물을 뜨겁게 흘렸다. 그러나 글도 못 쓰는 주제에 문학 외적인 요인으로 찌그러질 수는 없었다. 또한 인간들을 경멸할 수도 없었다. 시끄러운 인간들이 없다면 혹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읽어줄 사람도 사라지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카드빚으로 바지를 사 입었다. 그러자 눈이 번쩍 뜨였다. 바지가 참 맘에 들어 하루 종일 입고 다녔다.
결론이다. 그 뒤로 글을 잘 쓰게 되었느냐면, 그렇다. 문장을 만드는 데 재미가 붙었다. 그리고 소음도 안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내 집중력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런데 산책길에 주정뱅이를 다시 마주쳤다. 어째선지 맨 정신이었고, 이사 가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주유소에 가보자 어찌된 일인지 음악도, 기계 목소리 재생음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인상 좋아 보이는 젊은 매니저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바지 얘기는 농담이었는데 역시 인생이란 안 웃긴 농담 같은 것인가?
나는 그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염없이 걸었다.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제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