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세 번째｜구슬약
글 최은미 ㅣ 소설가. 1978년생
소설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 등
내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고 땅에서 굴리기도 했고 먹었다가 뱉기도 했던 그 구슬은 요즘도문구점에서 판다. 우리 집에도 몇개가 굴러다녀서 고무나무 화분 안에 모아두었다. 푸른빛이 도는 투명 구슬은 햇빛이 비치면 더 반짝거린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으면 이래서 집어먹었나보다 싶을 만큼 빛깔이 수시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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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엄마가 가끔씩 하는 얘기가 있다. 그건 엄마의 첫 번째 아기였던 내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이야기다. 옛날에 우리 옆집엔 마음씨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일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옆집으로 모이길 좋아했다.
그날 낮에도 동네 여자들은 옆집 평상과 마루에 아이들을 데리고 모였다. 큰 아이들은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했고 작은 아이들은 엄마 곁을 맴돌며 놀았다. 엄마가 마루에 앉아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 기어 다니는 돌배기였던 내가 갑자기 다가와 엄마를 움켜쥐었다. 엄마가 돌아봤을 때 나는 이미 얼굴이 새파래져서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엄마는 당황해서 울고 다른 아줌마들은 발을 굴렀다. 그때 달려온 것이 옆집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를거꾸로 들더니 등을 탁, 내리쳤다. 내 목에서 튀어나온건 구슬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이 기억에 없었지만 옆집 할머니를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자랐다. 그때 할머니가 얼마나 신속하고 절도 있게 내 등을 내리쳤는지를 엄마는 해마다 재연을 했던 것 같다.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유난히 알약을 넘기지 못했다. 약을 휴지통에 버리면 엄마한테 들킬까봐 장판을 열고 그안에다 버렸다. 엄마는 내가 좀 더 수월하게 약을 먹기를 바랐는지 알약과 복숭아맛 쿨피스를 함께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약을 잘 먹게 되는 대신 약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복숭아맛 쿨피스를 못 먹게 되었다.
어릴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알약을 삼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웬만하면 아프고 말지 싶지만 원고마감을 앞두고 편도선으로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일이 생기면 약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예닐곱 개는 되는 흰색 정제와 캡슐약들을 앞에 펼친다. 컵에 물을 가득 따른다. 한 번에 두 개를 삼키는건 불가능하다. 약 한 알을 집어 심호흡을 한 뒤 물과 함께 삼키면 약은 입천장 끝에 붙어서 도로 나오거나 눈물이 날 만큼 헛구역질을 한 후에야 넘어간다. 그런 과정을 예닐곱 번 반복해야 약 한 봉지를 다 먹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최악의 삼사십년 후는 이런 것이다. 나는 소화기계와 순환기계, 근골격계에 각각 만성질환 하나씩을 갖고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다. 가족들은 모두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잔액이 아슬아슬한 원고료 통장과 노트북 하나만을 든 나는 저소득 홀몸노인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착실하게 약을 받아온다. 한 번에 정제 하나밖에 넘기지 못하는 내 앞에는다 펼치면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약봉지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나는 그 알약들을 하루 세 번, 식후 삼십분마다 먹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내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고 땅에서 굴리기도 했고 먹었다가 뱉기도 했던 그 구슬은 요즘도 문구점에서 판다. 우리 집에도 몇 개가 굴러다녀서 고무나무 화분 안에 모아두었다. 푸른빛이 도는 투명 구슬은 햇빛이 비치면 더 반짝거린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으면 이래서 집어먹었나보다 싶을 만큼 빛깔이 수시로 바뀐다.
엄마는 여전히 내가 죽었다 살아났던 날 얘기를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옆집 할머니의 기지 대신 엄마의 아기에 대한 얘기가 더 많아졌다. “그 어린 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내 앞섶을 막 쥐어뜯는데……” 돌배기 아기의 악력이 그렇게 셀 수가 없었다고, 엄마는 내가 질식 직전에 엄마한테 매달리던 얘기를 한다.
나는 오늘도 화분 앞을 지나가면서 구슬을 본다. 그 구슬은 내게 약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그 구슬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살고자 했던 어떤 힘을 떠올리게도 해준다. 해가 좋은 날엔 구슬을 보면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중얼거리기도 한다. 젊은 엄마가 눈앞에서 아기를 잃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그 아기가 말년에 알약 형벌을 받는다고 해도 일단은, 어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