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불행의 자의식
글 송재학 ㅣ 시인. 1955년생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기억들』 『진흙얼굴』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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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자의식이란 말은 헤겔의 ‘불행한 의식’이란 용어를 내가 임의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나의 무의식이다. 모든 존재는 즉자와 대자로 구별할 수 있다. 즉자(卽自), 즉 의식 없는 존재는 자체동일성의 존재로, 예컨대 돌은 돌이라는 자체동일성을 가지고 영원히 그 돌/자체로 존재하는것이다. 대자(對自)적 존재로서 인간은 의식이 있고 의식의 본질은 무엇에 대하여 사유하는, 자기동일성이란 특성을 가진다. 즉 인간은 자체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동일성의 회로로 존재하는 생물체이다. 자기동일성이라는 건 인간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면서 감성, 오성, 이성, 개체, 집단, 사회, 국가로 발전하는 기저에는 이러한 자기동일적 회로에의 근본적 갈망과 결핍이 있기에 인간은 완전체가 아닌 불완전체이다.
이에 비해서 신은 즉자대자이자 대자즉자인 존재 즉 자기 자신의 본질이 자기원인인 즉자이자 대자인 존재로 불만이 없는 완전체이자, 자기 행동의 원인을 완벽히 파악한 존재로 절대정신이랄 수 있으니, 인간도 이런 절대정신을 지향하자는 게 헤겔의 진리 개념이자 불안한 의식이라는 용어의 탄생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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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자의식이란 잣대는 음악보다 기계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오디오 마니아에게도 해당이 된다. 현재 가진 기계보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혹은 상상의 기계에 대한 불행한 자의식 때문에 예컨대 오디오 마니아들이 마음 편하게 드보르자크의 현악4중주 ‘아메리카’를 감상한 적이 별로 없다는 고백을 들었다. 저역의 부드러움, 고역의 뻗침에 대한 욕망이 끝이 없으며, 스피커의 음장감과 음역 사이의 변화에 한없이 마음을 뺏기고 있으니 그건 음악이 아니라 소리에 대한 편애에 다름 아니다. 헤겔의 불행한 의식이란 말이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불행의 자의식은 또한 문학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김승옥 소설의 특징을 칭하는 ‘존재로서의 고독’, ‘감수성의 혁명’, ‘경계인의 초상’ 등을 떠올려보면 “하나의 반대되는 요소가 자기와 반대되는 것 속에서 정지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반대물로서 새로이 등장하는 모순된 운동”인 불행한 의식이란 정의가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는 비평을 보면, 그러한 불행한 의식은 지양까지의 과정에서 의식이 겪는 불행에 대한 문학 체험이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무의식과 의식은 또한 불행한 의식의 행로를 남긴다. 9권의 내 시집들 속에서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자아는 여러 번 등장한다. 먼저 아버지는 사별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현실을 떠난다. “그 너머 가면 / 돌아오지 못할 길이 / 내 등 뒤에서 휘어지는 중이다 / 복사꽃잎 쌓이는 십 리 길, / 글썽이는 집 앞, / 모롱이의 철새 떼와 만나고도 오래 / 길은 첩첩 쌓인다 / 며칠 지나 달빛 밟고 되돌아오면 / 식구들도 집도 / 한 잎 나뭇잎 그대로 초록일까”라는 시행은 아버지와 살아남은 자의 의식이 합쳐지는 부분이다. “금방 산으로 따라갔어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으셨다 산모롱이 흰 길로 햇빛이 눈부시고, 아버지의 나라는 저 햇빛 속인가”처럼 내가 중학 1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시 속에서 결핍과 애정의 불행한 모순을 동시에 가진 대상이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현실과 책과 글쓰기를 통해서 차츰 변모·변주되기 시작한다. 우선 현실의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기에 그 병은 책을 통해서 시대를 얻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흘러버린 날짜의 맨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책의 첫 페이지에 서 있다 그곳의 시간은 늘 멈추어서 저 아래 검은 물 날카로운 절벽 끝인데”라는 행간 속에 희미하게 서 있는 망자의 그림자를 나는 움켜쥐었던 것이다. 어린 중학생은 친구들의 아버지를 통해서 아버지의 부재가 얼마나 커다란 억압인가를 일찍 알았다.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의 현현을 위해서 아버지는 현실과 다른 인격체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상력만으로는 화자 자신이 결코 아버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모순이 드러난다. 불행한 자의식이 가진 필연의 모순이다. 이제 육탈하려는 현실의 아버지와 가지지 못한 아버지의 계속적인 변모는 시 속에서 수많은 회로를 거치면서 결국 서로 포옹하려는 상호길항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졸시 「소래 바다는」의 아버지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밑이 희끗한 /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날 /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 하셨다 /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과 마주한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 새치가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 소주를 마신다, /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소래의 아버지를 통해서 화자는 불행한 의식을 지양했을까. 애처롭게도 불행한 자의식은 지양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도달해야하는 시 속의 화자는 아버지의 의식과 자식의 의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의식이야말로 불행한 의식의 시작이자 결말이었다. 결말이 이미 내정된 시작이었다고도 적을 수 있다. “동강 무덤에 간다 / 내가 짊어지고 간 것이 아버지만은 아니다 / 내가 간다면 그분도 자신의 무덤에 온다”라는 조금은 슬프고 누구나 다 겪는 희로애락의 문제가 이 불행한 의식의 끝이 아닐까라는 성찰! 그러니까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불행한 의식은 되풀이하는 자의식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본다면 첫사랑과 같은 인간이 겪어야하는 순정한 의례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다시 이승/주검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숭고한 섭리에 따른다.
울 어머니 매년 사진관에 다녀오신다그곳에서 아버지 늙어가시니어머니 미간의 지층을 뜯어내면지척지간 아버지 주름이다굵은 연필이라면 머리카락 몇 올 아버지 살쩍에 옮겨늙은 목탄 풍으로 바꾸는 게 어렵지 않다지그때마다 깃 넓은 신사복은 찡그리면서아버지, 어머니 그림자처럼 늙으신다라는 편안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보이는 것이다. 이승/주검이지만 불행한 의식의 맨 끝에는 이렇게 현실의 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그림자처럼 늙으”시는 상상의 아버지가 공존하는 법이다.
아니, 공존해야만 가능한 가족주의라는 평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늙어가는 것처럼, 의식의 변모도 이루어진다. 그 변모가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것만은 아니겠다. 결국 불행한 의식이라는 인간이 파악한 이 불안의 심리는 인간이 통과하는, 통과할 수밖에 없는, 생의 순수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