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글 조용미 ㅣ 시인. 1962년생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기억의 행성』 등
언덕 위에서부터 신전을 보고 내려오다가 <추락한 이카로스>를 후면에서 발견하고 달려가 앞에서 본 장면은, 충돌이라면 충돌이고 반동이라면 반동이고 조화라면 또 조화이기도 한 풍경이었다.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지은 언덕 위의 신전과, 태양을 향해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로 떨어진 이카로스의 조각상은 동일한 장소에 놓일 수밖에 없는 필연성으로 묶여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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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들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상호 간섭하고, 어떤 기억들은 강력한 연관성에도 이어지지 못하고 망각되며, 어떤 동질의 기억들은 기어코 서로 밀어내고야 만다. 아그리젠토, 신들의 계곡 콘코르디아 신전 앞에는 추락한 이카로스가 누워 있다. 이 거대한 청동조각상 때문에 신전의 아름다움과 폐허의 풍경은 더욱 증폭된다. 기원전 4백80년에 지어져 아직까지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콘코르디아 신전 앞에, 2011년 제작된 현대의 조각이 마치 원래 거기 그대로 이천 년을 함께 있어온 듯 전혀 이질감 없이 놓여 있다.
언덕 위에서부터 신전을 보고 내려오다가 <추락한 이카로스>를 후면에서 발견하고 달려가 앞에서 본 장면은, 충돌이라면 충돌이고 반동이라면 반동이고 조화라면 또 조화이기도 한 풍경이었다.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지은 언덕 위의 신전과, 태양을 향해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로 떨어진 이카로스의 조각상은 동일한 장소에 놓일 수밖
에 없는 필연성으로 묶여 있었던 걸까.
시칠리아에서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 1944-2014)의 <추락한 이카로스>를 보며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특별한 풍경을 만나 나의 감각이 전적으로 가동되는 일이 생길 때면 간혹 있는 일이기에 무심하게 지나갔지만, 집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더듬어보니 조각난 기억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미 그의 작품을 두어 번 보았던 것.
로마의 한 성당 문 앞에 나는 꽤 오래 서 있었다. 로마시대 폐허가 된 유적을 그대로 사용하여 세워진 성당의 청동 문 부조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청동 문을사진에 담느라 들어갈 생각도 잊고 있었다. 수태고지를 표현한 듯한 오른쪽 문 천사의 날개도,고개 숙인 마리아의 팔 없는 모습도, 왼쪽 문의 남자의 가슴을 가로지르며 깊이 파인 십자가 형상도 무척 절제되어 문은 빈 공간이 훨씬 많았다. 그의 조각에 매료되어 한나절을 온전히 그 성당을 둘러보는 데 시간을 다 보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 베니스의 카포스카리 대학에 가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산마르코 방향으로 나왔다가 숙소가 있는 도르소두로 쪽으로 돌아가려면 늘 지나야 했던 좁은 골목의 화랑안뜰에 커다란 두상이 있었다. 안뜰 중앙에 놓여 있던 두상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 그곳을 지날때마다 들어가 보고 나왔다. 두상 앞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 누구의 작품인지도 몰랐지만 나는또 그의 조각에 끌린 것이다.
그 기억에 힘입어, 사진을 담아둔 파일에서 정확하게 그 사진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로마와 베니스, 그리고 시칠리아의 시간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완벽한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마치 잃었던 소중한 기억을 회복한 것 같았다. 20년 전 이고르 미토라이의 조각전이 서울에서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땐 그를 몰랐지만 그래도 가보았을 수도 있었는데, 일어나지도않았을 것 같은 일로 나는 안타까웠다.
아그리젠토에서 추락한 이카로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고르 미토라이라는 이름을 그냥 지나쳤더라면, 추락한 이카로스의 날개가 베니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았더라면, 돌아와 로마의 청동 문을 소환해내지 않았더라면, 나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아무 의미도 없이 제각각 기억의 한조각으로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이고르 미토라이의 이카로스는 세상의 모든 장소를 다 거쳐 아그리젠토의 신전 앞에 와 추락했다. 나는 기억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그 앞에 섰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