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허위와 가식을 배제하고 일상의 진리를 찾다

모모와 김삼순의 시절 - 2005년의 화제작 『모모』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맨드라미 책」 외 「등을 잃었다」 외

순간, 순간들 필경사 조풍년

가방이 퉁탕퉁탕 뛰어다녀요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엄마에게는 ‘지옥’, 아이에게는 ‘세상’이었다 - 영화

바람이 분다

정지용과 길진섭의 북방여행 그리고 「화문행각」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질문하고

한국과 베트남 정서의 접점

20세기 초반 달라진 여성작가의 목소리

이기적 글쓰기

미국 체류기, 아니 그냥, 버클리 일기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등

2016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 외

번역후기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질문하고

글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 ㅣ 번역가, 영국 틸티드 액시스 출판사 발행인. 1987년생
영역서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 등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영역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번역이란 번역인 동시에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라 쳐도, 이 자명함 뒤에는 번역에 관한 오해의 가능성이 도사린다. 번역은‘단 한 가지’ 해석을 낳지 않는다. 혹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번역은 새로운 독자들에게 원문이 지닌 다수의 가능성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하고, 동시에 번역된 작품을 접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각자의 문화·정치적 프레임과 개개인의 인생과 독서 경험에 의해 틀잡히고 결을 띠게 된 개별적인 주관에 따라 작품을 해석할 여지 또한 남겨주어야 한다. 번역가란 응당 — 편집자와 표지 디자이너, 홍보마케팅 담당자와 마찬가지로 —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문화적 특수성을 문맥화하는 동시에 작품이 읽히고 수용되는 방법에 있어 과도한 방향 지시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같은 소설을 번역할 때면 이러한 줄타기는 더욱 중요해진다. 사회 금기에 도전하는 이 잔혹하고도 지극히 시적인 연작소설에서 주인공 영혜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월급쟁이 남편과 비디오아티스트인 형부,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언니의 신경을 건드린다. 이들이 영혜에게 때로는 폭력적으로까지 반응하는 이유는 영혜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해 일절 설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영혜라는 중심인물을 주변 인물들의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영혜에게 극단적인 수동성을 부여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강은 주인공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유럽 중심적 통념에 도전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문학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오래된 오해의 바탕이 되어온 통념에. 영혜가 식구들이 지닌 두려움과 선입견과 억눌린 욕망을 다만 담아내기만 하는 일종의 그릇에 불과한 인물로 그려지듯이, 『채식주의자』 또한 그 입장과 ‘의미’를 두고 서로 천차만별로 나뉘는 해석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작품이다 ― 비단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뿐 아니라 문화와 문화 간에서도. 『채식주의자』가 국경을 성공적으로 가로지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이 특징 덕일 텐데(『채식주의자』는 이미 폴란드와 베트남,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에까지 번역이 되었다), 번역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 때문에 또 고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 데보라 스미스와 한강 소설가의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사진(출처-맨부커 공식 트위터) ©

과연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해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여지를 남기면서도 이 소설의 영역본을 접하는 독자들이 원서를 접한 독자들과 최대한 근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인가?
다행히도 『채식주의자』는 사회학적 보고서보다는 음시(音詩)에 가까운 작품이고, 그만큼 원문에‘충실한’ 번역가가 활용할 법한 문화적 특성에 뿌리내린 요소들 이외의 여타 요소들을 충분히 제공한다. 그 첫째가 시적 문체다. 이는 한강의 문장이 지니는 특색이기도 한데, 한강이 시인이기도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한강의 작품을 접할 때면 나는 장르를 불문하고 그 작품특유의 분위기와 어조와 결이 하나의 정제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경험을 종종 하는데, 이건 작가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의 이중생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생한 인상은 번역가에게 매우 유용하다. 『채식주의자』만 봐도, 한국에서 애초 세 편의 중편으로 나뉘어 출간된 사실이 시사하듯, 1, 2, 3부가 각각 특유의 인상을 남긴다 — 단정적인 어조와 무심함, 연민으로 인해 다소희석된 데다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욕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표백된 피로감.그런데 설사 문체와 어조, 스타일과 음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알맹이로 인해 각기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그나마 하나된 독서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해도, 작품이 지닌 해석의 다양성은 과연 어떻게 보장해야 할까? 나는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편집하는 단계에 들어서야 (이 과정에 한강도 겸허히 참여해 세심한 조언을 해주었다) 영어 이외의언어로 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들이 이 소설을 각기 어떻게 해석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해석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중에는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선택과 판단들도 있었다. 예컨대 베트남 독자들이 가부장적 가족 구조의 역학 관계에 쉬이 공감하리라는 출판사의 판단이라든
가, 한국 소설치고는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역시나 베트남 시장에서는다소 선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 등. 그리고 나로서는 생각조차 못했던 의견과 해석들도 있었다(하지만 그러한 해석들의 논리에는 곧바로 수긍이 갔다). 『채식주의자』를 번역하면서 나는 ‘오월의 신부’라는 별명을 어떻게 옮겨야 좋을지 한참 고심한 바 있었다(‘오월’은 1980년 5월에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항쟁을 가리킨다). 한강은 『채식주의자』의 폴란드어 번역가처럼 ‘오월의 신부’를 ‘산타 마리아’로 번역하면 어떻겠느냐고, 영국 독자들도 이 표현을 납득하겠느냐고 물었다. 결국 우리는 폴란드와 같이 가톨릭 문화가 강한 나라에서는 영혜의 육식 거부를 자기희생에 기반한 육체적 고행으로 볼 가능성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각에서라면 영혜가 과거 기독교 성자들이 그러했듯 금욕을 통해 종교적 무아지경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불교에서는 영혜의 선택을 인간 동물의 내재적 폭력성을 떨쳐내기 위한 조금은 더 조용한 시도로 볼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The Vegetarian』이 영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봤다. 영국 독자들은 유교적 위계에 따른 경직된 사회 질서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가능성이 적었다. 내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호칭을 옮김에 있어 개개인의 이름을 쓰기보다는 한국식으로 ‘처제의 남편’이라든가 ‘지우 어머니’와 같은 관계에 기반한 호칭을 사용하기로 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또 최근 들어 영국에서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히 일고 있는 점을 고려했을 때, 『The Vegetarian』이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위험과 그로 인해 생길 문제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한강 작가는 지난해 런던 북 페어에서 이런 섣부른 판단을 직접 경험해야 했다. ‘가족과 관계’를 논하는, 여성 작가들로만 구성된 패널에 한강도 엮여 들어갔던 것이다(반면 남자 작가들은 ‘정치와 예술’에 대해 논했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영혜는 자기 몸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젊은 여성, 즉 순응을 강압하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가 그녀에게 지정해 준 역할을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인물로 읽힐 소지가 컸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다른 가능한 해석들에 비해 덜 맞는 것도 덜 틀린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독해는 자칫 작품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작품을 문학보다는 사회인류학적 보고서로 읽어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소설의 2부에서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가 자기 몸에 꽃을 그리도록 허락하는 가운데도, 영혜는 이 욕망에 불타는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 묘하게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여기서 독자는 과연 영혜가 자기 변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 주위 사람들을 얼마만큼 이용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이러한 영혜의 각오가 정신 질환이라는 문맥은 물론이고 성 정치의 맥락에서도 얼마나 문제적일 수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의 다른 작품들이 이미 영어로 소개됐더라면 영어권 독자들도 욕망과 수동성을 소재 삼는 이 작가의 주제 의식을 보다 심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을 터다. 예컨대 한강이 욕망과 수동성을 탐구함으로써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주체성이 어떻게 얽히고 동요하는지, 그 복잡한 지형을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주제 의식이 단지 작가의 ‘한국적’ 배경이나 성별에서 나왔다기보다는, 한강이란 개별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예술가의 존재와 창작의 과정에 대한 정교하고 지긋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할 때, 영어권 독자들이 『The Vegetarian』을 읽어내는 방식 또한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 『The Vegetarian 』 마지막 페이지의 꿈에 관한 부분 ©

번역가로서 나는 당연히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고자 최대한 노력하는데, 『The Vegetarian』의 경우 영어와 한국어의 거리 때문에도 원문의 효과를 영어 번역문에 재현하고자 적확한 문장 구조와 어휘를 찾기 위해 공을 들여야 했다(이때 원문과 번역문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1부를 번역하면서 나는 ‘완전히(completely)’, ‘당연히(surely)’와 같은 부사를 몇 군데 삽입했는데, 이건 영혜의 남편이 말투에서부터 현학적이고 또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는 사람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식적 선택이었다. 반면 2부에서는 성적 묘사를 적절히 옮기기 위해 고심했는데, 미사여구로만 치장을 해서도 그렇다고 임상 보고서처럼 건조해서도 안 됐다. 하지만 작가와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말을 두고서였다. 영혜의 언니 인혜가 “surely the dream isn’t all there is?” 하고 영혜에게 말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인혜의 확신 없는 머뭇거림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을 우려했고, 이에 나는 영어의 ‘surely’란 단어가 어째서 확신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화자가 스스로를 설득하고자 노력하는 인상을 주기 마련인지 설명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한강은 이 소설이 독자들을 자극하고,불편하게 만들고, 독자들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모색하게끔 만들기 바란다고 했다. 나 역시 내 번역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그런 자극을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번역 : 이예원

※ 영역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 )』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영국 Portobello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