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글 최은희 ㅣ 최태응의 삼녀, 시조시인. 1954년생
최태응(1916-1998년) ㅣ 소설가. 황해 은율 출생. 경성제대 중퇴. 민중일보 편집부장, 부인신보 편집국장 등 역임. 작품집 『전후파』 『슬픔과 고난은 가는 곳마다』 『바보 용칠이』 『만춘』 등. 상허 이태준의 추천으로 《문장》을 통해 등단하였으나 일제 말기 파시즘체제 하에서 1942년 낙향하여 고향 인근의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직후 월남하여 언론문화계에 종사하면서 작품활동을 병행하였으며 한국전쟁때는 서울 수복 이후 종군활동에 나섰다. 종군 시절 장편 소설을 연재하는 등 60년대 후반까지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친 ‘월남민 출신의 전쟁 구세대 작가’ 중 한 명이다.
1998년, 작은언니로부터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뉴욕행 티켓을 어렵사리 구해 비즈니스 석에 앉았다. 13시간 내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필름은 내 년시절의 아버지를 고스란히 데려왔다.
장례식을 마친 후 장지인 파인란 메모리얼 파크로 갔다. 롱아일랜드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서던 스테이트 파크웨이를 달리는 동안 무더운 뉴욕의 강한 햇볕이 줄곧 따라오며 버지를 배웅하였다. 아버지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와 만났으리라. 불현듯, 흰색 양복에 흰 구두를 신은 동경 유학 시절 사진 속의 왕자 같은 아버지 모습이 점점 크게 다가와 내 앞에 멈춰 섰다.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친구,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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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미술관(부암동 소재)에서 열린 ‘이중섭 화가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다녀왔다. <자화상>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자화상은 중섭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그려준 것이었는데 이중섭 사후(死後) 50년쯤에 아버지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중섭 아저씨는 우람한 풍채에 피부도 하얗고 아주 멋지게 생겼다. 난 아저씨의 넓은 등에 업혀 다니는 것이 언제나 기분 좋았다”라고 언니는 회고 하였다.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군용 지프가 나타나면 온 동네 아이들이 환호하며 달려가고 우리는 깡충깡충 뛰며 아버지를 맞았다. 6·25전쟁 때 피난 가 있는 동안 서울 용산에 있던 우리 집을 누군가가 몰래 팔아버려서 돌아갈 집이 없었던 우리는 피난 중 어머니가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대구 근교의 칠곡에 자리를 잡았다.
종군작가로 활동 중이었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오셨는데 그 해 여름 어느 날 중섭 아저씨를 데려와서 우리 집에 남겨두고 가셨다. 얼마 후 아버지가 집에 오면서 그림물감을 사오셨다. 그동안 흰 종이에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거나 아버지가 두고 가신 담뱃갑에서 나온 은박지에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던 중섭 아저씨는 나를 안고 연못으로 가서 큰 나무 밑에 자리를 잡더니 나무판자에 그림을 그렸다. 그날 그린 그림은 다른 많은 그림들과 함께 우리 집에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1955년 가을쯤 아버지는 아저씨를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며 데리고 갔다. 그 뒤론 아저씨를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오빠는 중섭 아저씨의 유품이 들어 있는 가죽 가방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아저씨의 아들을 만나면 전해줄 거라고 했다. 그 가방 속에는 아저씨의 두 아들 사진과 은박지 그림들과 발가락을 클로즈업 시킨 그림, 아이들 그림, 게 그림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 가방은 아저씨가 대구 성가병원에서 퇴원할 때 오빠가 아저씨한테 받아 온 것이었다. 우리 집엔 워낙 아버지 제자라는 사람들, 글 쓰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중섭 아저씨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머니 마지막 생애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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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그리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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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은 우리 4남매를 대구로 데리고 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해는 우리 모두에게 몹시 힘들었던 해였다. 그해 11월 아버지의 일기장에 적혀 있는 시 「영어기(囹圄記)」에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머니는 결혼할 당시 진남포의 풍정소학교 교사로 오르간과 스케이팅을 잘하는 이름난 여선생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 부모님은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황해도 장년에 중흥학원이라는 소학교를 세워 해방이 될 때까지 가르쳤다. 월남 후 서울 용산에서 살다가 6·25때 피난 가 경북 칠곡의 매천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던 어머니는 복막염으로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 중 돌아가셨다.
광화문 아리스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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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늘 병원에 입원하셨다. 관절염이라는 당시로선 큰 수술을 여러번 했다.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남의 일엔 발 벗고 나서는 아버지 덕에 우리는 방 두칸짜리 셋집에 살 때에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자기는 굶어죽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것은 먹지도 받지도 않는다며, 아버지를 좋아하기에 우리 집에 오는 거라고 큰소리치며 웃던 천상병 시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중학생 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아리스 다방에 드나들었다. 아리스엔 늘 문인들이 모여 있었고 찻값은 으레 아버지 몫이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는 나더러 먼저 나가 있으라고 하더니 어떤 사람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주고 그분의 고무신을 신고 나오셨다. 놀라는 내게 아버지는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한쪽 눈을 찡긋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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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을 사랑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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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소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화가가 되겠다고 했으나 할아버지가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포기하고 중학 2년 여름방학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해방될 때까지 연주 활동을 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세계명곡집을 펴 놓고 이탈리아 가곡 등을 아버지와 함께 노래했다. 내가 본격적인 성악 레슨을 받을 땐 일본어로 된 교재를 번역하고 설명도 해 주셨다. 음악회, 영화, 미술전시회도 데리고 다녔다. 뉴욕 아트뮤지엄, 샌프란시스코의 미술관에도 데리고 가 해설까지 해 주셨다. “아버지, 왜 문학을 하게 되었어?” 했더니 “할 게 없어서……”라고 하셨다. 휘문고보 4년때 유도와 축구 선수로 활약했던 아버지는 그해 여름, 고향인 장년에서 열린 6면(面) 대항 축구대회에 선수로 출전했다가 시합 중 무릎을 다친 것이 곪아서 앓아눕게 되었고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았으면 음악이나 미술을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병실에 누워서 처음으로 쓴 것이 바로 데뷔작인 「바보 용칠이」다. 아버지는 한국문학의 역사를 쓰고 싶었는데 친구들이나 선배들을 욕보이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좌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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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22일의 일기 내용 중 일부이다.
“주님! 마냥 이럴 바에는 시한을 정해서 단 몇 달이라도 개운한 몸, 맑은 정신, 피로하지 않은 팔목으로 온전히 내 뜻대로 무엇이든 써 보고 죽게 해 주옵소서!”
소설이 아니라도 좋다. 구태여 소설일 필요가 없다. 모처럼인 글, ‘솔직과 사랑’으로 엮어서 남길…… 정말 글이 쓰고 싶구나.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하루 한 줄의 소설을 쓰자’는 아버지의 좌우명이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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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이전 부터 50년 넘게 쓴 30여 권이나 되는 일기장과 아버지의 모든 유품들은 고려대 학교 박물관에 영구 보존, 전시하게 되었다.
내년 이맘때쯤 아버지의 장편 소설 『전후파』의 한정판을 출간하여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을
모시고 작은 기념회를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몸은 비록 가셨지만 내 숨이 멎는 날까지 곁에 살아계시는 아름다운 나의 아버지, ‘백결 최태응’ 선생.
시조 한 수를 지어 올리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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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세 뼘 네 뼘 밤은 깊어 가고
홀로 버려진 땅 끝의 나를 보면서
당신의
마닐마닐하던
손등이 그립습니다
앞뜰 가득 벋은 라일락 그늘 아래
구메구메 만들어 준 꽃 계단 사이로
겹겹이
꽃잎 되어 날던
당신 곁이 그립습니다
- 2016. 5. 8. 故人의 막내 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