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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와 가식을 배제하고 일상의 진리를 찾다
- ‘실사구시’를 주창한 호남 실학의 선구자 양득중의 『덕촌집』
글과 사진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196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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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 양득중(1665~1742)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아니다. 덕촌에 대한 학계의 연구 실적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남긴 저서는 문집 『덕촌집』이 유일하다. 한국 유학사에서 그는 명재 윤증의 수제자로 언급될 뿐이다. 그것은 덕촌의 삶이 서울보다는 대부분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학문이제자들에게 이어지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최근 양득중이 한국 사상사, 특히 실학과 관련하여조명 받고 있다. 반계 유형원의 정신을 계승한 실학 사상가라는 평가와 함께 호남 실학의 선구자로 부상하고있다. ‘실사구시의 실천가’(박석무)라는 평가도 나오고있다. 지난해에는 전남대 호남학연구원과 조선대 고전연구원이 공동으로 완역본 『덕촌집』(전2권, 경인문화사)을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양득중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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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론의 거두’ 명재 윤증의 수제자 ◆
양득중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덕촌집』 연보에는 그가 7살 때 썼다는 ‘월출산’이라는 글이 한 편 실려 있다. ‘달은 동쪽에서 뜨는데, 산은 서쪽에 있네. 어찌하여 월출산이라 하는가. 산의 서쪽 사람들이 ‘월출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月出於東 山在於西 何以謂之月出山 山西之人 謂之月出山).’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어린 아이가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양득중은 총명함으로 일찍부터 영광에 유배를 간 문인 이세필이나 전라도 관찰사 신익상등에게 알려졌다. 서울에까지 유명세가 퍼지면서 과거를 보지 않고서도 박세채, 남구만 등의 추천을 받아 벼슬길에 나아갔다. 33세 때인 1697년 효릉참봉이 되었으며 사재감 주부, 공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1706년 회인현감에 임명되었고, 그 뒤 세자익위사 익위, 김제군수, 사헌부 지평, 장령, 집의 등을 거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승진되었다. 은일(隱逸)로 당상관 승지에 오른 것은 드문 일이다. 수많은 관직이 내려왔지만 실제 직무를 수행한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덕촌집』에 실려 있는 ‘장령을 사양하는 소’, ‘승지를 사양하는 소’ 등 여러 편의 사직 상소가 이를 방증한다. 문집에서 그의 관리 생활을 엿볼 수있는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양득중은 관리보다는 학자가 체질이었던 것 같다. 그는 15세 때 ‘이기론(理氣論)’을 지을 정도로 학문적으로 뛰어났다. 그가 논산의 대학자 명재 윤증(1629~1714)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30대 초반부터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승의 관계를 이어온 양득중은 41세 때 스승이 사는 논산과 가까운 공주 덕촌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후 양득중은 윤증의 사상적, 학문적인후계자뿐 아니라, 소론 당색의 이데올로그로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된다.
『덕촌집』에는 ‘대의를 밝힌 것에 대한 분변(明大義辨)’이라는 글이 있다. 노론의 영수 우암송시열(1607~1689)의 북벌론에 대한 비판이다. 송시열이 주자의 글을 모방해 ‘북벌’의 대의를 천명하고 있으나 북벌론은 허구일 뿐 아니라 주자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 데에서 나왔다는 논지를 강하게 펼치고 있다. 글에 송시열에 대한 존경심은 어디에도 없다. 송시열은 단지 ‘회천(懷川, 우암이 살았던 충남 회덕을 가리킴)’으로 지칭될 뿐이다. 글은 양득중의 말년인 1740년에 쓰였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신랄해 송시열의 라이벌이었던 윤증이 환생해 쓴 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논쟁적인 글로 국립중앙도서관본 등 일부 판본에는 이 글이 빠져 있다.
◆ 『반계수록』의 가치를 알리다 ◆
양득중의 사상사적 기여는 실학자 반계 유형원(1622~1673)과 그의 대표 저서 『반계수록』을 세상에 알린 점이다. 이 역시 스승 윤증의 영향이다. 뒷날 ‘실학의 비조’로 불린 유형원이 실학자로 자리매김된 것은 사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양반 사족 출신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형원은 과거를 포기한 채 학문으로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결심으로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7년간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이 조선 실학의 선구적 저작이 된 『반계수록』이다. 그러나 3년 뒤 유형원이 세상을 뜨자 책도 묻힐 운명에 처했다. 독학으로 저술활동을 해온 반계에게는 그의 학업을 계승, 전수할 변변한 제자가 없었던것이다.
1741년 덕촌은 상소문(‘조정의 부름을 사양하면서 올리는 상소(又辭疏)’)에서 토지, 군사,부역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며 조정에 『반계수록』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렸다. “근세에 호남유생 유형원은 법제를 강구해 찬란하게 갖추어 놓았습니다. 토지 제도에서 시작해 교육문제, 관리 등용문제, 관직제도, 봉급제도, 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해털끝 하나까지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책을 이미 완성하고 이름붙이기를 ‘수록’이라 하였는 데 모두 13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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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양득중은 시급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위해 『반계수록』을 참고할 뿐 아니라 경연의 교재로 채택할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의 교재는 『주자어류』나 『대학연의』와 같은 중국 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서적으로는 『성학집요』 정도가 경연에서 읽힐 정도였다. 그러나 양득중은 『주자어류』는 선비가 시간이 날 때 읽을 만한 책이지 제왕학의 교재는 못된다며 임금이라면 모름지기 이 책 대신에 『반계수록』을 먼저 읽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계수록』이 경연의 교재로 채택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채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득중으로 인해 『반계수록』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알려졌고, 마침내 1770년 대구에서 간행되었다. 이후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청장관 이덕무는 『반계수록』을 이이의 『성학집요』,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조선의 3대 좋은 책’으로 꼽았고, 정조는 수원 화성을 건설하면서 이 책을 참조하였다.
양득중이 『반계수록』을 접한 것은 논산의 스승인 명재 윤증의 아래에서 공부할 때였다.
전북 부안에서 탈고된 책이 그곳에서 멀지 않은 논산의 윤증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양득중은 『덕촌집』에서 윤증의 말을 인용해 “이 책은 옛 성왕이 남긴 법도에 따라 편찬하여 그본뜻을 잃지 않았으며, 왕정을 행하고자 한다면 오직 이것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증이 『반계수록』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본 학자였다면, 양득중은 그 가치를 널리 알렸다고 할수 있다. 간행된 『반계수록』의 맨 끝에 윤증의 발문이 붙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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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사구시’, 삶의 철학에서 국정 지침으로 ◆
양득중의 삶의 철학은 허위와 가식을 배제하고 일상의 생활에서 진리를 찾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의 공리공론이나 허례허식에서 벗어나 실질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찾아가는 태도, 즉 ‘실사구시’다.
양득중은 장례에서의 허례와 허위의식을 예를 들며 실사구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시대에 장례 때 상주가 조문객과 마주보고 하는 통곡(相向而哭)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양득중은 이에 반기를 들며 맹목적인 통곡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의식은 원래 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3년이 지나 만났을 때 의지할 스승이 없음을 알고 서로 마주보고 통곡한 데서 유래했다. ‘상향이곡’은 그리움에 복받쳐 하는 통곡이니만큼 조문객을 맞을 때마다 형식적으로 하는 곡은 예가 아니다. 양
득중은 장례 때에는 아침과 저녁, 3년상 중에는 초하루와 보름에만 곡을 해도 된다고 말한다(마주보고 통곡하는 관습에 대한 이야기(相向而哭說)).
실사구시의 정신은 이처럼 멀리 있지 않다. 양득중은 실사구시야말로 개인뿐 아니라 국가통치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며 상소문을 올릴 때마다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영조의 신임을 받아 자주 경연에 참여하였다. 영조가 세자 시절, 스승으로 모시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경연에서 탕평책과 부역의 개선책 등을 건의했는데, 그 실천 방법 역시 ‘실사구시’였다. 양득중이 경연에 참여해 영조와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등대연화」(『덕촌집』 권3)는 한국 문헌 가운데 실사구시의 용례가 들어 있는 최초의 글이다.
“근대의 허위의 풍조는 위로 고위 관리에서 아래로 사림에 이르기까지 헛된 이름만 드날리고 턱없이 높은 것만 내걸고 있어, 자기의 분수에서 ‘실사구시’의 의미를 전혀 유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 이 네 글자는 한나라 하간헌왕의 덕행을 형용한 것이지만, 소홀히 넘길 말이아닙니다. 요즘 세상의 허위의 풍조는 전혀 ‘실사구시’의 의미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텅 빈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양득중이 실사구시를 국정의 운영 지침으로 삼자며 절박성을 피력하자, 영조는 이 말이 좋다며 네 글자를 써서 벽에 걸어두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실사구시는 조선 후기 실학자의 슬로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연천 홍석주, 추사 김정희 등이 ‘실사구시설’을 써 이들이 조선 시대 실사구시의 원조처럼 알려져 왔지만, 이보다 150년 앞서 양득중이 실사구시적인 정책을 건의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출간된 『덕촌집』 번역본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필자는 2013년 몇 명의 지인과 한문 읽기 모임을 꾸려 『덕촌집』 읽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1년쯤 읽다가 접었다. 글이 까다로워 읽기가 쉽지 않은 데다 도중에 번역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힘들여읽느니 나중에 번역본을 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올해 초 번역본 출간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입수했다. 그러나 번역본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직역투의 문장은 쉽사리 들어오지 않아 여러 차례 원문을 대조하며 읽어야 했다. 필자의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볼 때도 오역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似涉輕率’을 ‘경솔히 물을 건너듯 하다’(번역본 1권 224쪽)보다는 ‘경솔
한 듯하다’가 원문의 뜻에 가깝고, ‘명대의변’의 첫구절의 ‘明大義大旨’는 ‘대의를 밝힌 큰 뜻’(번역본 1권 415쪽)이 아닌 ‘대의를 밝힌 대략적인 뜻’으로 해석해야 된다. 또 연보에 나와 있는 『유씨수록』은 ‘유형원의 『수록』’ 또는 ‘『반계수록』’이라고 써야 옳다.
번역은 독자들이 쉽게 텍스트를 읽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그런데 번역본을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 40여 년 전 민간기구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낸고전 국역본은 직역투의 문장이 많긴 하지만, 오역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국가 번역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책이 오역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