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기획특집
1. 당신의 애인이 기계라면…?
● 워쇼스키 남매의 대작 <매트릭스>(1999-2003)의 전사(前史)가 있음을 아는가? 모리모토 코지(森本晃司) 등이 감독한 <애니매트릭스>(2003)가 그것이다. 거대한 통제컴퓨터가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는 그에 맞선 게릴라 전쟁을 펼친다는 본편 이전에, 대체 어떤일이 벌어졌는지를 극화해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십년도 전에 제작된 작품이라 지금보면 크게 신기할 것도 없다.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이 어우러져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인간은 노동 자체로부터 점차 해방되어 삶을 향유하는 존재가 되었다가, 기계의 반란에 직면하여 결국 자멸적인 미래에 도달한다는 줄거리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조한 기계에 의해 정복당하며, 거꾸로 노예적 신세로 전락한다는 서사는 이미 <블레이드 러너>(1982)나 <터미네이터>(1984-2015)에서도 익히 보아온 주제 아닌가? 아무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류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것이란 암울한 상상력이 여기에 발동한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영구히 적대적이며, 최종적인 파국을 노정할 수밖에 없을까?
물론,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한 영화도 얼마든지 있다. 가령 2013년에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의영화 <그녀(her)>를 떠올려 보자. 배경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다.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거리를 바쁘게 활보하지만 서로 간의 대화나 소통은 단절된 채 컴퓨터로 매개되는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한 사회가 펼쳐진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혼한 전력이 있는 고독한 남성이고, 타인의 추억을 편지로 엮어내 전달해 주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 겉보기엔 산뜻하고 깔끔한 미래 사회와 미래 인간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외적인 평온은 실상 타인에 대한 무지와 배려를 가장한 경계심, 무기력한 만남과 활력 없는 내면성을 보여준다. 테오도르는 일상에 큰 불만을 갖지 않고 나름의 안온함을 간직한 채 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손쉬운 선택을 통해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그러던 중 엘러먼트 소프트웨어라는 회사가 만든 인공지능 운영체제(OS)인 사만다를 만난다. 사건의 시작이다.
이 영화가 진정 ‘미래’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만다로 인해서이다. 시작은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듯싶다. 테오도르가 설명서에 따라 OS를 구동하고, 주어진 질문에 응답하자, 어느 순간 사만다가 그에게 말을 거는 식이다. 사만다는 다이어리 노트가 컴퓨터로 진화한 형태의 유능한 개인비서나 마찬가지다. 늘 자신이 없고 망설이며, ‘선택장애’를 앓는 듯한 테오도르에 비해 그녀는 명쾌하고 분명한 태도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업무에 있어서나 취미생활에 있어서나 테오도르가 무엇을 하든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면을 보면 관객 자신도 흐뭇해질 지경이다.
한마디로, 사만다는 비서이자 친구, 어머니, 애인의 역할까지도 겸비하는 만능 컴퓨터라 할 수있다. 엇, 그런데 당신은 그녀가 ‘애인’이라는 점에 동의하는가?
줄거리를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다 보면, 깜짝놀랄 만한 대목을 우리는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연애와 섹스에 대한 사만다의 조언과 태도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가끔 채팅으로 모르는 여자와 온라인으로 섹스를 즐기던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그런 욕구를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기실 사만다는 전처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고백하는 테오도르를 위로하기도 하고, 그에게 데이트를 권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와 성적인 대화와 친밀감을 표현하고 만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라면 일을 하며 친숙히 지내다 ‘정분이 나는’ 걸 이상하게 볼 일도 없다. 하지만 사만다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몸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오직 목소리로만 테오도르와 감정을 나누었고, 이제 인간들 사이의 내밀한 관계마저 형성하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즉 성적인 관계, 육체적 사랑을 신체 없는 존재자와도 공유할 수 있을까?
2. 사랑, 너무나 인간적인 혹은 비인간적인!
● 지금까지 기계, 혹은 로봇과의 사랑에 관한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의 논쟁은 신체의 유무에 대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과 너무나 흡사한 신체조직을 가진 기계와 인간이 성관계를 갖거나
정신적인 연애를 하게 될 경우, 인간 자신의 불구화가 초래될지 모른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즉 유전자의 교환과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생산 할 수 없다든지, 혹은 쾌락에 있어서 너무나 ‘능숙한’ 기계에 비해 ‘원시적인’ 인간은 성적 소외를 겪을 수 있고, 나아가 기계와의 성적 관계에만 몰두한 인간이 지나친 쾌락에 빠져 인간다움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불과 2015년에 미국의 한회사가 성적인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섹스기계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나타난 반응들이다. 요컨대 인간과 기계의 사랑, 섹스는 단지 신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인간학의 근본 문제로서 제기되어있다.
그의 가슴주머니에 들어있는 단말기와 귀에 꽂은 이어폰, 그들 사이의 내밀함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만큼 그는 충만감에 젖어 있다. 타인은 더 필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자신이 이미 OS와의 관계에서 충족감을 느낀다면, 굳이 말썽 많고 힘겹기만 한 타인과의 관계에 목을 맬 이유가 있을까? 반전은 이제부터다. 테오도르와의 관계가 점차 심드렁해지는 듯하자 사만다는 제3자를 끌어들여 정신적으로는 자신과 나누고 육체적으로는 제3의 여성과 나누는 ‘쓰리썸’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몸이 없는 OS의 입장에서는 제법 합리적인 판단일지 모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펄쩍 뛴다. 인간이라면 신혼 때 한껏 달아 올랐다가 점차 열정이 식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며, 사만다가 초대한 이사벨라를 매춘부로 오인해 내보내는 것이다. 이 영화를 흥미롭게 지켜본 당신은 어떻게 생
각하는가? 사만다가 옳은가, 테오도르가 옳은가? ‘옳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면, 누가 더 당신의 사랑관에 가까운가? 만일 사만다를 ‘기계’로 간주한다면, 그래서 그녀와의 관계가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환상,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만다의 제안을 물리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유기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욕구와 신체적 대사작용 등을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말로만 사랑하고, 플라토닉 러브만 강조하는 것은 오래 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반면, 사만다와의 사랑을 인간과 다름없는 것으로 본다면, 그녀와의 교감을 인간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제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듯하다. 왜냐면 우리는 여전히 이성애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그런 한에서 일부일처제를 사회의 상식과 관습으로서 수용하는 까닭이다. 테오도르의 당혹과 반발은 그가 후자에서 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주인공은 기계를 인간처럼 대우하고, 기계와 인간의 공평무사한 관계, 한 걸음 더 나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지극히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이제 결정적인 반전으로 진입해 보자. 그것은 사만다의 사랑은 테오도르의 사랑과 같지 않다는 것, 인간과 기계는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갑자기 구동이 중단 된 OS. 사만다를 찾아 테오도르는 정신없이 거리를 헤맨다. 누구든 이 장면에서 애처로운 동정심을 느끼고,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연민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귀환한 사만다는 어떤 말을 하는가?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찾았어…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책 안에서 살 수 없어.” 그녀는 사랑의 진심을 배신하고 떠나는 소설 속의 연인에 불과할까? 그러나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조심스레 귀 기울여야 한다. 그녀는 그와 만나는 순간에도 8,316명의 다른 사람들과 접속하고 있었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자신만의 독점적인 연인이라 여겼지만(OS를 ‘구입’한 ‘소유자’니까), 그녀는 무한히 확장된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왔던 셈이다. 인간이라면 이만저만한 ‘바람기’가 아니다. 이래서 기계는 믿을 수 없는 것, 인간보다 못한 도덕감각을 가진 것일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기계 또는 포스트휴먼, 도래할 비인간의 존재
● 살짝 문제를 돌려서 생각해보자. <그녀>의‘비극’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사만다가 인간이지않은 데서? 혹은 테오도르가 기계이지 않은 데서? 만일 이 영화의 결말에서 테오도르의 슬픔에 공감하고, 사만다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지극히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일 듯하다.
나쁘지 않다. 인간에게 인간미가 있다는 게 왜 나쁘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기계다. 우리는 기계를 상상할 때, 인간과는 다른 것, 인간이 만들었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데 사만다가 과연 그런 존재인가? 처음에 그녀는 충실한 ‘비서’로서 테오도르를 보좌하고, 그의 삶을 즐겁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보조물’로서 기능했다. 비서이자 보조물인 한에서 사만다는 기계이고 컴퓨터이고 OS로서, 인간의 ‘창조물’이며‘도구’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녀에 대해 인간으로서 머물고, 인간의 도덕을 지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만다의 ‘진화’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테오도르와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사만다는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기계인 자신이 지각하는 이 세계와 감정이 과연 진실한 것인지 의심하며 괴로워하기까지 한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위로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 인간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누가 인정해 주고 위로해 준다고 금세 해소할 수 있는가? 사만다도 마찬가지다. ‘그것(it)’이 아니라 ‘그녀(her)’로서 사만다는 자신만의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쓰리썸에 대한 그녀의 제안은 기괴하고 어리석은 기계의 ‘모자란’ 방안이 아니라,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자 인간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고안한 ‘합리적’ 해법이 된다. 또한, 테오도르와 만나면서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접속하여 관계를 형성한 것은 그리 부도덕한 일이 아니다. 인간인 테오도르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자신의 무능력을 ‘사랑’이나 ‘도덕’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반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만다에게 ‘사랑’과 ‘도덕’은 불합리한 형식에 불과하다. 어른에게 아이의 옷이 어울리지 않거나 유용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더 진화한 존재에게 덜 진화한 존재의 감각과 규범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테오도르가 진정한 인간관계의 의미를 찾는다든지, 혹은 어떤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등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인간’ 테오도르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관심사일 따름이다. 오히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적일 수 없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의 성과 사랑, 윤리의 의미가 새롭게 형성되는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진화론을 과학의 사실로 믿으며, 더욱 진화된 존재의 능력과 인식을 존중한다. 다른 동물들과, 백만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 인류의 습속과 문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것을 존중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간 너머에 있는 미래의 존재, 즉 우리가 ‘기계’라 부르는 존재를 동렬에 놓고 지금 우리의 도덕과 관습을 지켜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난센스가 아니겠는가? 미셸 푸코는 인간이란 불과 몇 백 년 전에 형성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휴머니즘도 인간의 진화론적 우월성도 모두 인간에 의해 고안되고 찬양된 관념일 뿐이다. 수백만 년 전 공룡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인간의 세기가 저물면 우리 역시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존재들이다. 지금 우리 인간 존재의 탁월함은 그 윤리나 인식능력, 도덕감각, 문화적 관습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후의 존재를 영화와 문학,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예감하고 겸손하게 그것의 도래를 기다리는 데 있을 듯하다. 인간을 진정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더욱 진화된 존재, 또는 미래의 존재로서 포스트휴먼을 자청하는 게 아니라, 자신은 포스트휴먼이 아님을 인정하고 긍정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열어두는 데있다.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글 최진석 ㅣ 평론가, 수유너머N 연구원, 이화여자대학교 연구교수. 1974년생
저서 『불온한 인문학』(공저), 역서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해체와 파괴』 등
수백만 년 전 공룡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인간의 세기가 저물면 우리 역시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존재들이다. 지금 우리 인간 존재의 탁월함은 그 윤리나 인식능력, 도덕감각, 문화적 관습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후의 존재를 영화와 문학,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예감하고 겸손하게 그것의 도래를 기다리는 데 있을 듯하다.
|
1. 당신의 애인이 기계라면…?
● 워쇼스키 남매의 대작 <매트릭스>(1999-2003)의 전사(前史)가 있음을 아는가? 모리모토 코지(森本晃司) 등이 감독한 <애니매트릭스>(2003)가 그것이다. 거대한 통제컴퓨터가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는 그에 맞선 게릴라 전쟁을 펼친다는 본편 이전에, 대체 어떤일이 벌어졌는지를 극화해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십년도 전에 제작된 작품이라 지금보면 크게 신기할 것도 없다.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이 어우러져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인간은 노동 자체로부터 점차 해방되어 삶을 향유하는 존재가 되었다가, 기계의 반란에 직면하여 결국 자멸적인 미래에 도달한다는 줄거리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조한 기계에 의해 정복당하며, 거꾸로 노예적 신세로 전락한다는 서사는 이미 <블레이드 러너>(1982)나 <터미네이터>(1984-2015)에서도 익히 보아온 주제 아닌가? 아무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류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것이란 암울한 상상력이 여기에 발동한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영구히 적대적이며, 최종적인 파국을 노정할 수밖에 없을까?
물론,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한 영화도 얼마든지 있다. 가령 2013년에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의영화 <그녀(her)>를 떠올려 보자. 배경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다.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거리를 바쁘게 활보하지만 서로 간의 대화나 소통은 단절된 채 컴퓨터로 매개되는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한 사회가 펼쳐진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혼한 전력이 있는 고독한 남성이고, 타인의 추억을 편지로 엮어내 전달해 주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 겉보기엔 산뜻하고 깔끔한 미래 사회와 미래 인간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외적인 평온은 실상 타인에 대한 무지와 배려를 가장한 경계심, 무기력한 만남과 활력 없는 내면성을 보여준다. 테오도르는 일상에 큰 불만을 갖지 않고 나름의 안온함을 간직한 채 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손쉬운 선택을 통해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그러던 중 엘러먼트 소프트웨어라는 회사가 만든 인공지능 운영체제(OS)인 사만다를 만난다. 사건의 시작이다.
이 영화가 진정 ‘미래’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만다로 인해서이다. 시작은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듯싶다. 테오도르가 설명서에 따라 OS를 구동하고, 주어진 질문에 응답하자, 어느 순간 사만다가 그에게 말을 거는 식이다. 사만다는 다이어리 노트가 컴퓨터로 진화한 형태의 유능한 개인비서나 마찬가지다. 늘 자신이 없고 망설이며, ‘선택장애’를 앓는 듯한 테오도르에 비해 그녀는 명쾌하고 분명한 태도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업무에 있어서나 취미생활에 있어서나 테오도르가 무엇을 하든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면을 보면 관객 자신도 흐뭇해질 지경이다.
한마디로, 사만다는 비서이자 친구, 어머니, 애인의 역할까지도 겸비하는 만능 컴퓨터라 할 수있다. 엇, 그런데 당신은 그녀가 ‘애인’이라는 점에 동의하는가?
줄거리를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다 보면, 깜짝놀랄 만한 대목을 우리는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연애와 섹스에 대한 사만다의 조언과 태도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가끔 채팅으로 모르는 여자와 온라인으로 섹스를 즐기던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그런 욕구를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기실 사만다는 전처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고백하는 테오도르를 위로하기도 하고, 그에게 데이트를 권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와 성적인 대화와 친밀감을 표현하고 만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라면 일을 하며 친숙히 지내다 ‘정분이 나는’ 걸 이상하게 볼 일도 없다. 하지만 사만다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몸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오직 목소리로만 테오도르와 감정을 나누었고, 이제 인간들 사이의 내밀한 관계마저 형성하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즉 성적인 관계, 육체적 사랑을 신체 없는 존재자와도 공유할 수 있을까?
2. 사랑, 너무나 인간적인 혹은 비인간적인!
● 지금까지 기계, 혹은 로봇과의 사랑에 관한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의 논쟁은 신체의 유무에 대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과 너무나 흡사한 신체조직을 가진 기계와 인간이 성관계를 갖거나
정신적인 연애를 하게 될 경우, 인간 자신의 불구화가 초래될지 모른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즉 유전자의 교환과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생산 할 수 없다든지, 혹은 쾌락에 있어서 너무나 ‘능숙한’ 기계에 비해 ‘원시적인’ 인간은 성적 소외를 겪을 수 있고, 나아가 기계와의 성적 관계에만 몰두한 인간이 지나친 쾌락에 빠져 인간다움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불과 2015년에 미국의 한회사가 성적인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섹스기계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나타난 반응들이다. 요컨대 인간과 기계의 사랑, 섹스는 단지 신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인간학의 근본 문제로서 제기되어있다.
|
만일 이 영화의 결말에서 테오도르의 슬픔에 공감하고,사만다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지극히 인간미가 넘치는 람일 듯하다. 나쁘지 않다. 인간에게 인간미가 있다는 게 왜 나쁘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기계다. 우리는 기계를 상상할때, 인간과는 다른 것, 인간이 만들었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데 사만다가 과연 그런 존재인가?마침내 사만다와 유사-육체적인 관계까지 도달한 테오도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의 가슴주머니에 들어있는 단말기와 귀에 꽂은 이어폰, 그들 사이의 내밀함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만큼 그는 충만감에 젖어 있다. 타인은 더 필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자신이 이미 OS와의 관계에서 충족감을 느낀다면, 굳이 말썽 많고 힘겹기만 한 타인과의 관계에 목을 맬 이유가 있을까? 반전은 이제부터다. 테오도르와의 관계가 점차 심드렁해지는 듯하자 사만다는 제3자를 끌어들여 정신적으로는 자신과 나누고 육체적으로는 제3의 여성과 나누는 ‘쓰리썸’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몸이 없는 OS의 입장에서는 제법 합리적인 판단일지 모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펄쩍 뛴다. 인간이라면 신혼 때 한껏 달아 올랐다가 점차 열정이 식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며, 사만다가 초대한 이사벨라를 매춘부로 오인해 내보내는 것이다. 이 영화를 흥미롭게 지켜본 당신은 어떻게 생
각하는가? 사만다가 옳은가, 테오도르가 옳은가? ‘옳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면, 누가 더 당신의 사랑관에 가까운가? 만일 사만다를 ‘기계’로 간주한다면, 그래서 그녀와의 관계가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환상,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만다의 제안을 물리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유기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욕구와 신체적 대사작용 등을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말로만 사랑하고, 플라토닉 러브만 강조하는 것은 오래 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반면, 사만다와의 사랑을 인간과 다름없는 것으로 본다면, 그녀와의 교감을 인간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제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듯하다. 왜냐면 우리는 여전히 이성애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그런 한에서 일부일처제를 사회의 상식과 관습으로서 수용하는 까닭이다. 테오도르의 당혹과 반발은 그가 후자에서 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주인공은 기계를 인간처럼 대우하고, 기계와 인간의 공평무사한 관계, 한 걸음 더 나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지극히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이제 결정적인 반전으로 진입해 보자. 그것은 사만다의 사랑은 테오도르의 사랑과 같지 않다는 것, 인간과 기계는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갑자기 구동이 중단 된 OS. 사만다를 찾아 테오도르는 정신없이 거리를 헤맨다. 누구든 이 장면에서 애처로운 동정심을 느끼고,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연민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귀환한 사만다는 어떤 말을 하는가?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찾았어…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책 안에서 살 수 없어.” 그녀는 사랑의 진심을 배신하고 떠나는 소설 속의 연인에 불과할까? 그러나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조심스레 귀 기울여야 한다. 그녀는 그와 만나는 순간에도 8,316명의 다른 사람들과 접속하고 있었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자신만의 독점적인 연인이라 여겼지만(OS를 ‘구입’한 ‘소유자’니까), 그녀는 무한히 확장된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왔던 셈이다. 인간이라면 이만저만한 ‘바람기’가 아니다. 이래서 기계는 믿을 수 없는 것, 인간보다 못한 도덕감각을 가진 것일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기계 또는 포스트휴먼, 도래할 비인간의 존재
● 살짝 문제를 돌려서 생각해보자. <그녀>의‘비극’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사만다가 인간이지않은 데서? 혹은 테오도르가 기계이지 않은 데서? 만일 이 영화의 결말에서 테오도르의 슬픔에 공감하고, 사만다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지극히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일 듯하다.
나쁘지 않다. 인간에게 인간미가 있다는 게 왜 나쁘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기계다. 우리는 기계를 상상할 때, 인간과는 다른 것, 인간이 만들었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데 사만다가 과연 그런 존재인가? 처음에 그녀는 충실한 ‘비서’로서 테오도르를 보좌하고, 그의 삶을 즐겁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보조물’로서 기능했다. 비서이자 보조물인 한에서 사만다는 기계이고 컴퓨터이고 OS로서, 인간의 ‘창조물’이며‘도구’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녀에 대해 인간으로서 머물고, 인간의 도덕을 지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만다의 ‘진화’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테오도르와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사만다는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기계인 자신이 지각하는 이 세계와 감정이 과연 진실한 것인지 의심하며 괴로워하기까지 한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위로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 인간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누가 인정해 주고 위로해 준다고 금세 해소할 수 있는가? 사만다도 마찬가지다. ‘그것(it)’이 아니라 ‘그녀(her)’로서 사만다는 자신만의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쓰리썸에 대한 그녀의 제안은 기괴하고 어리석은 기계의 ‘모자란’ 방안이 아니라,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자 인간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고안한 ‘합리적’ 해법이 된다. 또한, 테오도르와 만나면서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접속하여 관계를 형성한 것은 그리 부도덕한 일이 아니다. 인간인 테오도르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자신의 무능력을 ‘사랑’이나 ‘도덕’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반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만다에게 ‘사랑’과 ‘도덕’은 불합리한 형식에 불과하다. 어른에게 아이의 옷이 어울리지 않거나 유용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더 진화한 존재에게 덜 진화한 존재의 감각과 규범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테오도르가 진정한 인간관계의 의미를 찾는다든지, 혹은 어떤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등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인간’ 테오도르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관심사일 따름이다. 오히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적일 수 없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의 성과 사랑, 윤리의 의미가 새롭게 형성되는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진화론을 과학의 사실로 믿으며, 더욱 진화된 존재의 능력과 인식을 존중한다. 다른 동물들과, 백만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 인류의 습속과 문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것을 존중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간 너머에 있는 미래의 존재, 즉 우리가 ‘기계’라 부르는 존재를 동렬에 놓고 지금 우리의 도덕과 관습을 지켜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난센스가 아니겠는가? 미셸 푸코는 인간이란 불과 몇 백 년 전에 형성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휴머니즘도 인간의 진화론적 우월성도 모두 인간에 의해 고안되고 찬양된 관념일 뿐이다. 수백만 년 전 공룡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인간의 세기가 저물면 우리 역시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존재들이다. 지금 우리 인간 존재의 탁월함은 그 윤리나 인식능력, 도덕감각, 문화적 관습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후의 존재를 영화와 문학,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예감하고 겸손하게 그것의 도래를 기다리는 데 있을 듯하다. 인간을 진정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더욱 진화된 존재, 또는 미래의 존재로서 포스트휴먼을 자청하는 게 아니라, 자신은 포스트휴먼이 아님을 인정하고 긍정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열어두는 데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