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글 설호정 ㅣ 설창수의 장녀. 풀무원 김치박물관 관장. 뿌리깊은나무-샘이깊은물 전 주간. 1951년생
설창수(1916-1998년) ㅣ 시인. 경남 창원 출생. 니혼대학 중퇴, 경남일보 주필 및 사장, 문교부 예술 과장 등 역임. 시집 『삼인집』 『설창수시선』『설창수전집』, 수필집 『성좌있는 대륙』 등.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언론·출판·문학운동 등 전방위적 활동을 펼친 문인으로 개천예술제 개최 등 다양한 방법으로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노년에도 진주에서 지방문학 육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시는 짙은 역사의식 속에서 삶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고 있으며 초기의 서정성은 풍자시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글 때문에 좀 생각해 봤는데, 역시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구나 아버지의 시, 문학 세계, 인생관, 뭐 그런 거는 더 모르겠다. 부모 자식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문화적인 집안도 있다지만 우리는 그러지를 못했다.
다만, 거침없이 호오(好惡)를 표현하고, 불리한 지경에는 익살맞은 자기합리화로 대응하고, 화를 못 이겨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가도 누가 곁에서 말을 걸면 당장 ‘응?’ 하기 일쑤였던 분이었다는 건 알고 있다.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일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괴팍하고 평화롭지 않은 분이었던 건 분명하다. 특히 분노에 사로잡히면 한 방울의 마그마까지 남김없이 토해내고서야 그 ‘장엄한 분노’를 마무리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 형제들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사십대 초반에 이미 너무 유명해져 있지 않았었나 싶다. 그러나 그 성취를 한순간에 빼앗겼다. 그것도 부당한 권력에게. 타협을 모르는 아버지에게 남겨진 것은 분노뿐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초반에 고향의 유서 깊은 언론사의 주필 겸 대표를 맡았고, 한국 최초로 민간 예술제를 창설한 뒤 저명한 문화예술인들을 진주로 불러 모아 개천예술제를 열었다. 내가 농담으로 “그때 변영로, 이중섭 그림 좀 받아두지 그랬어요” 했더니 아버지는 즉각 “어데로(어디로. ‘아니’의 뜻)” 하셨다. 아버지에게 그분들은 예술제의 손님이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얘기였나 보다.
아버지는 경남일보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은밀히 신변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4·19 혁명 뒤 국회가 양원제가 되자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에 출마하여 당선하였다. 아버지가 흰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국회에 등원하던 사진을 본것도 같다.
아버지가 왜 정치에 발을 담그셨는지 물어본 적도 설명을 들은 적도 없다. 다만, 아버지는 그때도 천진난만하셨던 게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다. 지금 같으면 우리 형제들이 나서서 정치는 아버지 같은 분이 하는 게 아니라고 극력 말렸을 텐데 안타깝다. 그리고 한 해가 채 되기도 전에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시절에 우리는 어렸다. 그래도 아버지가 날마다 대취하여 자정이 가까워 집에 돌아온다는건 알았다. 어느 때는 경찰 백차(그때는 경찰차가 희었다)에 실려 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침이면 어머니가 “아버지 글 쓰신다. 조용히 해” 그랬다. 그때 아버지는 시를 쓰셨을까? 모르겠다.일기를 썼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한평생 일기를 쓰신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활의 책임은 온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아버지의 수많은 타이틀은 경제 활동과는 완전히 무관했다. 시 써서 돈 벌기는 예나 이제나 어려우니 그렇다 치고, 심지어 신문사 대표 자리도 거의 무급이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다. 두 분은 일본의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만났다고 했다. 서울 출신의 유복한 집안 신여성이 가난한 경상도 남자를 만난 것이다. 아버지는 하루 한 끼를 먹으며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아버지는 대학을 못 마치고 일경에 검거되어 2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죄목은 ‘청년학생 (반일 정신) 고취 선동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감하자 즉각 결혼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깡마르고 눈빛이 그야말로 형형해서 젊은 선승 같았다. 결혼사진인데!
5·16 군사 쿠데타는 아버지의 인생을 산산이 부수었다. 아버지는 군사정부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의 대상이 되어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신문사도 빼앗기고, 예술제도 빼앗겼다. 시를 발표할 지면도 빼앗겼다. 모든 사회 활동이 금지되었다. 군사 정권의 표현을 빌면 아버지는 ‘척결해야 할 구정치인’이었다. 몇 달밖에 못했지만 민주당 정권의 참의원이었으니까.아버지는 분노를 억누르며, 때때로 폭발시키며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뒤 군사 정권의 정점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군정 동참 제의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다웠던 거다.
신문사도 빼앗기고, 예술제도 빼앗겼다. 시를 발표할 지면도 빼앗겼다. 모든 사회 활동이 금지되었다. 군사 정권의 표현을 빌면 아버지는 ‘척결해야 할 구정치인’이었다. 몇 달밖에 못했지만민주당 정권의 참의원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분노를 억누르며, 때때로 폭발시키며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뒤 군사 정권의 정점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군정 동참 제의를 받았으나 끝내거절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다웠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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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뒤 내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겨진 아버지의 ‘사진’은 새벽녘 대문 밑에서 조간신문을 집어와 제1면에 빠짐없이 실리는 박정희의 사진을 찢어 없애는 장면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예닐곱 살짜리 막내아들에게 장기 한 판 두자고 구슬리는 장면이다. 이건 절절한 실화다.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는 세월을 그렇게, 돌이켜보면 다분히 시적으로 보내고 있었다.임방울의 <춘향가>와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그 세월의 우리 집 ‘배경 음악’이었다. 좁은 정원의 화초를 돌보며 아버지는 낡은 조립 전축에서 쏟아지는 임방울의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여……’를 들었다. 아버지는 어린 내 눈에도 처량해 보였다.
어머니도 학교에서 쫓겨났다. 박정희 군정의 지침이었던 듯하다. 어머니는 지체 없이 집 앞을 헐어 관광 기념품 가게를 열었다. 신성한 교직보다 더 신성한 상업에 뛰어든 거다. 우리 집 가까이에 유명한 관광지인 진주성과 촉석루가 있었으므로 그런대로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위해 진주 시내 극장주들이 무료입장 패스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당국이 아버지를 ‘관리’하기 위해 전화를 놓아주었다. 두루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패스카드 덕분에 우리 할머니만 ‘엄앵란과 신성일’ 영화에 심취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1963년 12월 17일 군정이 만든 정치활동정화법이 완료되었다. 자식들은 자라나는데 가난은 나날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연금에서 풀려나자 당신의 시에 박생광을 비롯한 경남 출신 화가들의 그림을 곁들인 시화 전시회를 시작하였다. 비로소 생활인이 된 것이다. 아버지의 진정한 시는 그때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없는 우리는 아버지가 스타일 나게 살지 않는 것이 답답했으나 전국 각처에서 선선히, 또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시화를 사준 분들의 덕으로 대학을, 대학원을 졸업했다. 아버지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처럼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아버지의 분노 프로세스는 이 어둠을 통과하는 방편이었던 듯도 하다. 어떻든 아버지는 한평생 화나는 일을 참은 적이 별 없는 분이다. 내 남편은 아버지가 세상 뜨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화내고 싶은 거 다 화내시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거 다 소리 지르시고, 마지막에는 잠깐 치매로 애기처럼 되어 식구들에게 사랑 받다가 떠나셨다. 우리 장인은 참 복도 많은 분이다.” 남편 말이 거진 맞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왠지 눈시울이 젖었다. 손주들을 어를 때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환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서.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가 외손주들이 보고 싶다고 하면 이렇게 대답했다.
“애들 보시려면 서울-진주 왕복 비행기 값은 내셔야죠.”
아버지는 내 농담을 알아들으시고는 언제나 선선했다.
“알겄다. 줄게.”
아버지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인 내게 너그럽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이를테면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젖은 종이처럼 흐느적거리며 귀성한 내게 아버지가 한 말은 꼭 이 두 마디였다.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들이 열린다.” 헬렌 켈러의 말이었다. 그리고 “푹 자거라!”였다.
아버지는 결혼 주례를 많이 하셨다. 군사 독재 타도를 주제로 한 격렬한 시사평론이 주례사라는 난처한 소문을 우리도 듣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례 청이 끊이지 않았다. 시인, 언론인에 심지어 참의원 타이틀까지가 얹혀 지방 소도시에서는 주례로 모시기에 괜찮은 ‘거물’로 대접받았다.
나는 대학 때 한 해를 휴학하고 고향 집에서 빈둥거렸다.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었고 무엇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소설책 보다가 자고, 자고 일어나 또 소설책 보는 세월이었다. 무협소설까지 통달했다.
그날도 아버지가 주례를 하러 가시는 모양이었다. ‘어른이 출타 하실 때’ 반드시 배웅하고……뭐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던 때니까 마루 끝에서 인사를 하고 돌아와 다시 책을 읽다 오수에 빠져들었다. 여름이니까
아버지가 이승을 벗어나며 그 다음 생을 이미 받았다면, 부디 시인이 되지 않았기를 빈다. 다섯 감각기관이 예민해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뒤집어 보았다 해야 하는 예술 같은 거 말고 고요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에 집중하고 계시기를 빈다. 그렇게만 해도 우리 아버지였던 분은 분명 무엇이 되실 만한 분이었으니까. 텅 빈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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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보니 책상 위의 돌 화병에 꽃이 한 움큼 꽂혀 있었다. 아버지가 가슴에 달았던 주례용 부케였다. 깜짝 놀라 꽃을 빼고 화병 속을 들여다보았다. 화병 속에는 맑은 물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내가 잠든 방에 살짝 들어와 시건방진 딸이 몰래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가 가득한 돌 화병을 깨끗이 씻어 부케를 꽂아놓고 나가셨던 것이다. 1970년대의 한국하고도 마초의 땅 경상도남자인 우리 아버지가! 나는 아버지에게 졌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은 “부인은 자제분이 몇이신지?”였다. 내 포도주 빛 염색 머리를 신기해하면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치매였지만 언어 감각은 여전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린 용돈 5만원을 한복 조끼 주머니에 넣고 소중하게 만지던 아버지의 ‘귀여운’ 얼굴이 내 인생의 베스트 ‘한 컷’이다.
아버지가 이승을 벗어나며 그 다음 생을 이미 받았다면, 부디 시인이 되지 않았기를 빈다. 다섯 감각 기관이 예민해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뒤집어 보았다 해야 하는 예술 같은 거 말고 고요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에 집중하고 계시기를 빈다. 그렇게만 해도 우리 아버지였던 분은 분명 무엇이 되실 만한 분이었으니까. 텅 빈 무엇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