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미국 체류기, 아니 그냥, 버클리 일기
글 성기웅 ㅣ 극작가, 연출가. 1974년생
희곡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 「깃븐우리절믄날5」 「다정도 병인 양하여」 「태풍기담」 등
이곳 버클리의 사람들 중에는 다중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경계인 혹은 아웃사이더라 자처한다. 그런 그들에게, 말하자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그어져있는 경계선을 자꾸만 의식하는 내 얘기가 혹시 고루한 내셔널리즘으로 들렸을까?경계인과 아웃사이더들이야말로 그 경계의 문제를 풀어내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 3월 11일, 금요일
…
반 년 동안 살 내 새로운 집에서 첫 아침을 맞았다. 버클리에 도착해서 1주일 동안 임시 숙소에 머물며 집 계약이며 전기, 가스, 인터넷 서비스 승계 같은 일들을 치열하게 치러낸 끝이다.
버클리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방문학자로부터 이 집과 자동차, 가구며 온갖 가재도구까지를 그대로 인수할수 있었던 건 정말 운 좋은 일이었다. 버클리대학 캠퍼스의 북쪽, 고급 주택가인 버클리언덕이 막 시작되는 곳에 자리잡은 이 아담한 아파트의 3층 내 방으로부터 보이는 베이브릿지와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이 근사하다. 문제는 억울할 만큼 비싼 월세. 버클리가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상의 도시이며 히피의 발상지 같은 곳이란 걸 생각하면 크나큰 모순만 같다.
저녁에는 다운타운으로 내려가 ‘가지(Aubergine)’란 제목의 연극을 봤다. 한국계 극작가 줄리아 조가 쓴 신작 희곡의 공연. 3백석 규모의 제법 큰 극장에 관객들이 가득 들어찼다. 젊은 대학생들이 많을 줄 알았더니 백인 노인층이 많다. 버클리언덕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인 것일까?
무대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국말 대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한국인 캐릭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한국말과 일본말이 뒤섞이는 2중언어 연극을 여러 편 만들어왔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처음 보는 연극이 영어와 한국어의 2중언어 연극이라니. 한국말의 그 낯선 질감에 귀가 간지러웠다.
|
|
# 3월 20일, 일요일
…
바트(BART, 이곳 베이 지역의 전철)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크리스를 다시 만나러 갔다.
크리스는 버클리대학에서 일본 현대연극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인데 지난 2월까지 1년 동안 일본 도쿄에 방문연구자로 가있었고, 그 사이 내가 일본 연극인들과 함께 만들었던 <신 모험왕>과 <태풍기담>의 도쿄 공연을 보았다.
꼼꼼하고 부지런한 이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콜로키엄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콜로키엄 제목을 “Staging the Legacy of Colonialism in Korea-Japan Theatrical Collaborations”(식민주의의 유산을 무대화한 한-일 협업의 연극 작업들)로 낙착시켜준 것도 그다. 뿐만 아니라 버클리의 연극, 동아시아 전공자들에게 나를 열심히 소개해주고 있다.
24번가/미션 역 근처 멕시코 식당에서 독특한 부리토로 점심을 먹고,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다음달 내 퍼블릭토크에서 틀 공연 기록영상의 영어 자막에 관해 상의했다. 크리스는 한국말은 못 하기 때문에 내 희곡의 일본어본을 바탕으로 영어 자막을 번역하고 있다. 카운터에서 스페인말로 수다를 떨고있던 중년의 종업원이 우리를 위해 천장의 전등을 밝혀주었다.
크리스와 헤어져서 혼자 여행 가이드북을 들고 멕시칸들의 동네인 미션 지구를 돌아다녔다. 유명하다는 발미 골목의 벽화들을 찾아가보니 강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같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동성애자들의 해방구로 알려진 카스트로 거리에 다다랐을 적엔 해가 저물고 있었다.
|
# 3월 28일, 월요일
…
일본학과 비교문학, 영화가 전공인 사스 교수의 대학원 수업에 가서 간단한 특강을 하게 됐다.
내 얘기에 앞서 한국 영화 전공자인 안진수 교수가 자신의 최근 논문들을 설명했다. 1950~60년대 한국영화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의 기억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60년대 한국에서 만주 배경의 활극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뒤이어 나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과시인 이상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그들을 다룬 내 연극 장면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내 연극 <깃븐우리절믄날>의 한 장면, 조선의 청년들이 미국 영화를 일본어 자막으로 보고나온 후 한국말과 일본말을 뒤섞어 대화하게 된다는 설정을 생각보다 쉽게들 이해했다.
|
|
# 4월 14일, 목요일
…
이날 4시에 버클리대학 도 도서관(Doe Library)에서 시작된 내 콜로키엄은 여섯 달 동안의 이번 버클리 체류 중 내가 치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통역을 거치지 않고 영어로 발표를 해보겠다는 건 애초부터 좀 무모한 도전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겨우겨우 원고는 정리했지만, 영어를 읽는 연습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어 자막을 넣어서 편집한 공연 기록영상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발표가 되었던 것 같다.
오늘 발표에서 나는 일제강점기 역사와 관련된 내 연극 작업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것, 때로 한국과 일본 공연에서 심각하게 다른 반응들이 나왔던 것을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내 작업을 비롯하여 한-일 간의 관계를 다루는 최근의 연극들에서 등장인물들의 국적과 언어가 뒤섞이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도 초점을 맞춰보려 했다.
이곳 버클리의 사람들 중에는 다중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경계인 혹은 아웃사이더라 자처한다. 그런 그들에게, 말하자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그어져있는 경계선을 자꾸만 의식하는 내 얘기가 혹시 고루한 내셔널리즘으로 들렸을까? 경계인과 아웃사이더들이야말로 그 경계의 문제를 풀어내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
# 4월 28일, 목요일
…
아침부터 중국계 작가인 바니와 함께 일본계 극작가 필립 고탄다 교수의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들을 잇따라 청강했다.
바니는 지난 번 고탄다 교수의 토크 이벤트에서 만난 홍콩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다. 이메일로 자신의 시를 보내주었길래 읽어봤더니 조부모세대의 2차대전 경험과 일본에 대한 감정에 관해 적은 시들이 있어 조금 놀랐다. 어떤 시에서는 중국어 단어나 일본어 단어가 섞여들어 있었다.
한편 고탄다 선생은 내게 과분할 정도로 세심한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다. 지난 내 콜로키엄의 모더레이터 역할도 맡아주었고, 탁월한 연기 지도자인 헤롤드 교수의 수업들을 청강할 수 있게 주선해주었다. 극작가 줄리아 조를 만나보라며 이메일로 중계를 해주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동료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무척 부러워하면서 그분이 아시안계 미국인 극작가로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말해주었다.
오전의 ‘극작’ 수업에서 고탄다 선생은 소수인종 출신의 학생들에게 자기 가족의 이야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쓰도록 격려한다. 오후 수업 ‘공연 문학’ 시간에 그가 읽을거리로 추천한 희곡의 목록에는 갖가지 마이너리티를 담고있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이날 ‘공연 문학’ 과목의 학기말 장면 발표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택한 작품은 작년에 서울에서도 공연된 적 있었던 애니 베이커의 <외계인들(The Aliens)>이었다. 무력한 젊은 세대를 그린 이 이야기에 학생들이 공감을 많이 느끼나보다. 한국 학생들로 이뤄진 은영, 은양, 지원네 조는 이걸 한국의 포장마차에서 벌어지는 장면으로 바꾸어 발표해서 환호를 받았다.
|
# 5월 4일, 수요일.
…
연극학과 대학원생들이 여는 희곡 낭독공연 시리즈의 이번 봄학기 마지막 공연을 보러갔다.
우고라는 이름의 브라질계 작가(혹은 학생?)가 희곡을 썼는데, 인종의 문제와 더불어 젠더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말았다. 두 달 동안 내 영어는 제자리걸음만 했나보다.
이제 다음주면 기말 시험을 보고 버클리대학은 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버클리에 온 지 불과 두달만에 나도 속절없이 방학을 맞게 된 거다.
저녁에는 두 주 전에 새로 등록한 버클리 어덜트 스쿨(Berkeley Adult School)의 영어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 이름은 ‘연기하며 배우는 영어’. 영어 희곡을 갖고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며 영어를 익히자는 수업이다. 알 만한 미국 극작가의 희곡이 대본으로 주어지니 나로서는 흥미롭다. 아직 사람들은 내가 극작가고 연출가라는 사실을 모른다.
10대 혹은 20대로부터 50대까지 학생들의 구성은 무척 다양하다. 인종도 물론 제각각이고 영어의 발음과 액센트도 천차만별이다. 수업이 끝나는 저녁 9시 반이 되기가 무섭게 경비원이 모든 교사와 학생을 쫓아내기에 아직 누구하고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대부분이 이민자들인 걸까? 몇몇 젊은 친구들이 일주일 새 대사를 많이 외워와서 꽤 열심히들 연습한다. 이 수업에서 주어지는 희곡들은 고탄다 선생이 추천하는 것들처럼 급진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대개 그냥 중산층 백인들의 이야기다. 그런 인물들의 말과 몸짓을 이제 막 미국 사회에 진입하려는 이들이 이렇게 연습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뉴스를 보니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도널드 트럼프가 확정되었단다. 여론조사의 지지율이 뜻밖에
높다.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정말 이민자들의 진입을 막는 높은 담장을 둘러칠까? 그런 그에게 환호를 보내는 미국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적어도 이곳 버클리에선 그 얼굴들이 잘 안 보인다.
편집자 주 ㅣ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대산-UC버클리 한국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성기웅 극작가의 버클 리 현지 소식을 2회에 걸쳐 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