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가방이 퉁탕퉁탕 뛰어다녀요
박효미 ㅣ 동화작가, 1970년생
동화 『일기 도서관』 『길고양이 방석』 『오메 돈 벌자고?』 『노란 상자』『우리집 괴물 친구들』 『왕자 융과 사라진 성』 『학교가 문을 닫았어요』『블랙아웃』 『고맙습니다 별』 등
오후가 되자 바람이 더 자주 불었어요. 구름도 끼었고요. 지호네 달리기는 꼴찌였어요. 지호아빠는 뒤뚱거렸고, 지호 엄마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뛰느라 몹시 느렸어요.지호는 꼴찌라고 투덜거렸어요. 가을이는 완전히 시무룩해졌지요. 아예 뛰지도 못했으니까요.좋다 만 하루였어요. 아니, 진짜로는 엉망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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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이 퉁탕퉁탕 뛰어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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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최고 최고! 가을이 마술사다.”
사촌 언니가 오랑우탄처럼 방바닥을 두드리자, 책꽂이에 있던 오랑우탄이 툭 떨어졌어요.
“가을아, 시간 됐다. 가자.”
뒤이어 엄마 목소리가 들렸어요. 엄마가 일하는 우리동네농축산물은 추석날도 문을 열어요. 온갖 야채, 온갖 고기가 다 있는데, 뭐든 빨리 팔아야 해요. 숙주나물과 콩나물이 젤로 문제예요. 하루가 끝나기 전에 못 팔면 쓰레기가 되고 만대요. 가을이도 잘 알지요.
가을이가 부엌 쪽으로 소리쳤어요.
“엄마, 놀다 가면 안 돼요?”
“작은엄마 가을이 마술사 됐어요, 순간이동 더 보고 싶어요.”
사촌언니까지 졸랐지만 가을이 엄마는 벌써 짐을 다 챙겼어요. 혼자 지하철 타고 올 거면 맘대로 하래요. 하지만 말만 저러는걸요. 진짜 그랬다가 엄마는 속상하다며 난리칠 거예요. 가을이는 바닥에 떨어진 오랑우탄을 보았어요. 가을이처럼 잔뜩 찡그리고 있었어요. 엄마 나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가을이는 분홍가방에다 짐을 챙겼어요.
늙디 늙은 고물차가 컥컥거리더니 겨우 출발했어요. 어찌나 큰소리로 부릉거리는지 라디오 소리도 안들렸어요.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더 키웠어요. 어떤 아줌마가 설거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출했다고 말했어요. 서른 명이나 밥을 먹어서 그릇이 싱크대를 넘어 식탁, 거실로 넘어갔대요. 라디오 속 아줌마는 남자들도 당해봐야 한다며 콧방귀를 뀌었어요.
“그럼, 당해봐야 알지. 당연히.”
엄마가 운전을 하면서 맞장구 쳤어요.
‘당해봐야 알지, 당연히.’
한 번 더 들렸어요. 가을이는 엄마를 보았어요. 엄마는 옆 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중이었어요. 흥, 당해봐야 알지, 이 소리는 또 들리고요. 가을이가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어요. 왼쪽 귀로는 옆 차한테 욕하는 엄마 소리가 들리는데, 오른쪽 귀로 아까 그 소리가 틀림없이 또 들리는 거예요.
오른쪽 허벅지 옆에 놓아둔 분홍가방이에요. 가을이가 밤낮으로 끌고 다니는 깜찍한 분홍가방에서나는 소리였다고요. 가을이는 살그머니 가방 지퍼를 열었어요. 오랑우탄이 눈을 부릅뜨고 가을이를 쳐다보았어요. 흥, 당해봐야 알지, 하고 또 말하면서요. 빙긋, 웃음이 났어요.
“맞아! 당연해.”
가을이가 소리치자 오랑우탄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엄마가 창문을 올렸어요.
“그치 가을아? 저렇게 한심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은 당해봐야 안다니까.”
가을이는 분홍가방의 지퍼를 조심스레 잠갔어요.
그날 저녁이었어요. 엄마가 숙주나물이 든 검정봉지를 들고 돌아왔어요. 엄마를 보니까 종일 찌푸렸던 기분이 싸악 풀어졌어요. 가을이는 엄마 꽁무니를 졸졸 따라갔어요. 텔레비전은 재미없고, 책읽기는 완전 지겨웠다고 말할 참이었지요. 엄마가 핸드폰을 열었어요. 가을이는 그만 우뚝 서고 말았지요. 보나마나, 들으나마나예요.
“언제 와? 추석날도 일하냐? 그만큼 일하면, 그만큼 돈을 벌던가. 오늘 같은 날도 가을이 혼자 있었잖아. 나는 숙주나물이나 들고 오고. 숙주라면 정말 지겨워.”
아빠한테 전화할 때 엄마는 눈썹 사이에 꼭 십일자를 만들지요. 엄마 말이 다 맞아요. 정말 지겨워요. 엄마도, 아빠도, 숙주나물도요. 엄마가 농축산물가게에 나간 뒤부터 숙주는 식탁의 주인이 됐어요.돼지숙주볶음, 오징어숙주볶음, 김치숙주볶음, 버섯숙주볶음, 그게 싫증나면 오징어먹물숙주탕, 돼지뼈다귀숙주탕, 묵은김치숙주탕, 냉동버섯숙주탕. 숙주만 봐도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난다고요.
“그럼 어쩌겠어? 숙주만 공짜로 주는걸. 숙주랑 콩나물은 얼른 팔아치워야 한다고 했잖아. 남은 콩나물은 주인이, 우리는 숙주. 으휴, 나도 싫다”
가을이가 숙주 반찬이 싫다고 하니까 엄마는 자기가 더 싫다고 펄펄 뛰었어요. 숙주를 떠올리니까 가을이는 입맛이 뚝 떨어졌어요. 방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예요.
‘툭닥툭닥, 으휴, 툭닥툭닥, 으휴.’
가을이는 살금살금 방문을 열었어요. 분홍가방이 울룩불룩거리고 있었어요. 아차차, 오랑우탄을 깜빡하고 있었어요. 잽싸게 지퍼를 열었는데, 오랑우탄이 콧바람을 씩씩거리네요.
“으휴! 숙주는 싫어! 숙주는 싫어!”
엄마보다 가을이 마음을 더 잘 알아요.
“맞아, 숙주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고!”
가을이가 맞장구치자 오랑우탄이 쿵쿵 자기 가슴을 쳤어요.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