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단편소설
순간, 순간들
희순 씨는 창밖을 바라본다. 잘랐던 감나무 가지마다 싹이 돋아나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현관 입구에 서 있는 괘종시계에서 보름달이 차오르듯이 차르륵 소리가 난다. 희순 씨는 곧 종이 울릴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수십 년 동안 들어온 종소리이다. 마침내 타종이 시작된다. 희순 씨는 하나, 둘, 셋, 넷, 종소리를 센다. 종소리는 열둘까지 울릴 것이다. 다섯, 여섯, 일곱에 이르러서 숨을 멈춘다. 희순 씨는 마지막 열두 번째 종소리의 여운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한다. 종소리는 집안을 꽉 채운 뒤 감나무 너머로 퍼져나간다. 희순 씨의 눈꺼풀 사이로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빛이 명멸한다. 집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진다. 희순 씨의 평온한 얼굴 위로 한 줄기 맑은 빛이 쏟아진다. 오월이다. 남식 씨는 성당에 가고없다.
* * *
오월이었다. 희순 씨는 남식 씨와 파란 대문 앞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아담한 뜰이 보였고, 뜰 한가운데에 어린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남식 씨는 이고 있던 보따리를 가슴으로 받아 안고 새 주인답게 대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뚜룸하게 서 있는 앙상한 감나무 한 그루뿐 뜰을 차지하고 있는 화단은 텅 비어 있었다. 희순 씨는 남식 씨처럼 거침없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방금 걸어온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황해도 해주에서 경기도 남양주로, 남양주에서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서울 수유리, 이 파란 대문 앞에 서기까지, 파란 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전쟁이 있었고, 피난행렬이 있었고, 뒤에서 옆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고, 부모형제는 만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희순 씨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인가, 심호흡 같은 것이 필요했다. 이런것이었다. 희순 씨는 아내와 아이 셋이 딸린 가장이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아찔했다. 희순 씨와는 천양지차로 남식 씨는 돌아보고 말고 할 것 없이 매사에 거침이 없었다. 그에 걸맞게 목소리도 쩌렁쩌렁 우렁찼다. 희순 씨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그림자 꼬리를 밟듯 가사를 걸친 스님 한 분이 대문 앞을 지나갔다.
*
아버님, 파리에 유학 온 지 처음으로 지난 주말 기차를 탔습니다. 생라자르 역에서 북쪽으로 가는 기차였습니다. 광장에는 서울역 광장처럼 시계탑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탑에는 아버지 책상 위에 걸려있던 검은 테의 둥근 시계와 같은 시계들 수십 개가 엉겨 붙어 있습니다. 아침에 기차를 타러 갈 때 그냥 지나쳤다가, 저녁에 돌아오면서 시계탑으로 향했지요. <모두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조각품이었습니다. 바로 아버님께 보내드리는 엽서 사진이 그것입니다. 아버님은 아마 이 엽서를 받으시고 이 애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곤란한 사정이 생긴 것으로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북쪽은 노르망디 지역입니다. 아버님께서 어린 저와 경서,우리 둘을 앉혀 놓고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몇 번이고 들려주셨지요.
‘혁혁했다’라는 말을 아버지가 힘주어 반복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곳, 노르망디 쪽으로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아버지의 고향과 감나무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추측이 맞습니다. 무슨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오직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외국인으로 살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부조리한 일인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까닭인지, 아주 오래전, 우리 집앞을 지나가다가 발길을 돌려 앙상한 감나무 옆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갔다던 스님을 떠올리곤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긴가민가해지기도 하구요. 아버지, 지금쯤 감꽃이 하얗게 피어 있겠지요?
*
희순 씨는 정성을 다해 쑥을 다듬는 남식 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남식 씨가 무엇을 할 때에는 말을 붙이면 안 되었다. 새끼들 세뱃돈을 세든가, 화투를 치던가, 집집마다 돌릴 만두를 담든가, 쑥을 다듬든가. 희순 씨와 천양지차로 남식 씨는 무엇이든지 분명해야 했다. 너무 분명해서 관계가 부러지고, 끊어지기 일쑤면서도 한 치도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 희순 씨는 세상에서 남식씨가 제일 무서웠다. 화를 낼 때 남식 씨의 목소리는 도끼로 장작을 패듯 힘세고 단호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받아먹지 않으면 남식 씨는 불같이 화를 냈다. 밤을 먹을때면 오줌이 마려웠다. 남식 씨가 잠자리에 누우면 똥이 마려웠다. 희순 씨의 소원은 오줌도 똥도 혼자 누는 것이었다. 황금 똥을 누고 싶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처럼, 똥도 마음대로 싸지지 않았다. 똥 싸는 일에 하루를 보내는 날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잠. 희순 씨는 잠을 자고 싶었다. 숨 쉬는 것도 힘이 들고, 숨을 안 쉬는 것도 힘이 들었다. 힘이 안 드는 것은 잠뿐이었다. 그런데 밥처럼 잠도 희순 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밥을 안 먹고 잠을 자면, 잠만 자면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머리 위에서, 등 뒤에서, 남식 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남식 씨는봄이 오기도 전에 쑥 뜯으러 가야 한다고 경서에게 성화를 댔다. 경서 나이도 이제 쉰 중반, 낼모레면 육십이었다. 맞서는 것보다 수용하는 편이 세상을 평안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경서였다. 남식 씨의 소원대로 봄날 하루 쑥을 뜯으러 가도록 희순 씨 곁을 지켰다. 남식 씨가 경서에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쑥떡이 될 거야, 내 마음이니 모두 아무 말 말아.” 희순 씨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양 귓속에 찡 박혀 있는 보청기를 슬그머니 뺐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쑥을 다듬는 남식 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틀니를 뺀 남식 씨의 얼굴이 하회 할미 탈 같았다. 희순 씨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남게 될 남식 씨가 마음에 걸렸다. 뒤늦게 남식 씨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은 혼자 남게 될 때를 대비하라는 누군가의 지속적인 속삭임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희순 씨는 좋아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말릴 일도 아니었다. 희순 씨의 눈길이 느껴졌는지, 남식 씨가 쑥을 다듬던 손으로 얼굴을 스윽 어루만져 주었다. 쑥 향이 콧속으로 훅, 퍼졌다. 남식 씨가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
“당신, 누구요!” 우체부로부터 하숙방 앞에 웬 처녀가 서성거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교문을 나와 종종 걸음으로 마을로 가보니, 눈도 코도 입도 키도 몹시 작은, 처음 보는 여자가 희순 씨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나와서는 둘을 에워쌌다. 정혼한 여자가 오남식이라는 이름이라는 것을 새겨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남식이라는 처자와 혼사를 치르기로 했다고 희순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이 3년 전이었다. 전쟁전, 고향에서 양가 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희순이 통성명 할 새도 없이 막무가내로 가슴팍에 머리를 디밀고 달라붙어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여자를 겨우 떼어내며 물은 것이 “당신,누구요!”였고, 눈물범벅으로 딸꾹질까지 하며 여자가 대답한 말이 “임자, 처자야요!”였다. 그것은 희순 씨와 남식 씨가 나눈 첫 대화였다. 그날 밤, 은서가 생겼고, 이듬해 형서가, 그 이듬해 경서가 생겼다. 모두 연년생들이었다. 북쪽에 부모형제가 갈려 있는 처지에 혼례 같은 것은 없었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들
함정임 ㅣ 소설가,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1964년생
소설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동행』 『행복』 『당신의 물고기』『아주 사소한 중독』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춘하추동』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등
아버지의 추측이 맞습니다. 무슨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오직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외국인으로 살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부조리한 일인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까닭인지, 아주 오래전,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가 발길을 돌려 앙상한 감나무 옆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갔다던 스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긴가민가해지기도 하구요. 아버지, 지금쯤 감꽃이 하얗게 피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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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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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었다. 희순 씨는 남식 씨와 파란 대문 앞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아담한 뜰이 보였고, 뜰 한가운데에 어린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남식 씨는 이고 있던 보따리를 가슴으로 받아 안고 새 주인답게 대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뚜룸하게 서 있는 앙상한 감나무 한 그루뿐 뜰을 차지하고 있는 화단은 텅 비어 있었다. 희순 씨는 남식 씨처럼 거침없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방금 걸어온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황해도 해주에서 경기도 남양주로, 남양주에서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서울 수유리, 이 파란 대문 앞에 서기까지, 파란 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전쟁이 있었고, 피난행렬이 있었고, 뒤에서 옆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고, 부모형제는 만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희순 씨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인가, 심호흡 같은 것이 필요했다. 이런것이었다. 희순 씨는 아내와 아이 셋이 딸린 가장이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아찔했다. 희순 씨와는 천양지차로 남식 씨는 돌아보고 말고 할 것 없이 매사에 거침이 없었다. 그에 걸맞게 목소리도 쩌렁쩌렁 우렁찼다. 희순 씨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그림자 꼬리를 밟듯 가사를 걸친 스님 한 분이 대문 앞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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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파리에 유학 온 지 처음으로 지난 주말 기차를 탔습니다. 생라자르 역에서 북쪽으로 가는 기차였습니다. 광장에는 서울역 광장처럼 시계탑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탑에는 아버지 책상 위에 걸려있던 검은 테의 둥근 시계와 같은 시계들 수십 개가 엉겨 붙어 있습니다. 아침에 기차를 타러 갈 때 그냥 지나쳤다가, 저녁에 돌아오면서 시계탑으로 향했지요. <모두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조각품이었습니다. 바로 아버님께 보내드리는 엽서 사진이 그것입니다. 아버님은 아마 이 엽서를 받으시고 이 애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곤란한 사정이 생긴 것으로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북쪽은 노르망디 지역입니다. 아버님께서 어린 저와 경서,우리 둘을 앉혀 놓고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몇 번이고 들려주셨지요.
‘혁혁했다’라는 말을 아버지가 힘주어 반복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곳, 노르망디 쪽으로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아버지의 고향과 감나무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추측이 맞습니다. 무슨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오직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외국인으로 살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부조리한 일인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까닭인지, 아주 오래전, 우리 집앞을 지나가다가 발길을 돌려 앙상한 감나무 옆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갔다던 스님을 떠올리곤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긴가민가해지기도 하구요. 아버지, 지금쯤 감꽃이 하얗게 피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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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순 씨는 정성을 다해 쑥을 다듬는 남식 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남식 씨가 무엇을 할 때에는 말을 붙이면 안 되었다. 새끼들 세뱃돈을 세든가, 화투를 치던가, 집집마다 돌릴 만두를 담든가, 쑥을 다듬든가. 희순 씨와 천양지차로 남식 씨는 무엇이든지 분명해야 했다. 너무 분명해서 관계가 부러지고, 끊어지기 일쑤면서도 한 치도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 희순 씨는 세상에서 남식씨가 제일 무서웠다. 화를 낼 때 남식 씨의 목소리는 도끼로 장작을 패듯 힘세고 단호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받아먹지 않으면 남식 씨는 불같이 화를 냈다. 밤을 먹을때면 오줌이 마려웠다. 남식 씨가 잠자리에 누우면 똥이 마려웠다. 희순 씨의 소원은 오줌도 똥도 혼자 누는 것이었다. 황금 똥을 누고 싶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처럼, 똥도 마음대로 싸지지 않았다. 똥 싸는 일에 하루를 보내는 날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잠. 희순 씨는 잠을 자고 싶었다. 숨 쉬는 것도 힘이 들고, 숨을 안 쉬는 것도 힘이 들었다. 힘이 안 드는 것은 잠뿐이었다. 그런데 밥처럼 잠도 희순 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밥을 안 먹고 잠을 자면, 잠만 자면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머리 위에서, 등 뒤에서, 남식 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남식 씨는봄이 오기도 전에 쑥 뜯으러 가야 한다고 경서에게 성화를 댔다. 경서 나이도 이제 쉰 중반, 낼모레면 육십이었다. 맞서는 것보다 수용하는 편이 세상을 평안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경서였다. 남식 씨의 소원대로 봄날 하루 쑥을 뜯으러 가도록 희순 씨 곁을 지켰다. 남식 씨가 경서에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쑥떡이 될 거야, 내 마음이니 모두 아무 말 말아.” 희순 씨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양 귓속에 찡 박혀 있는 보청기를 슬그머니 뺐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쑥을 다듬는 남식 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틀니를 뺀 남식 씨의 얼굴이 하회 할미 탈 같았다. 희순 씨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남게 될 남식 씨가 마음에 걸렸다. 뒤늦게 남식 씨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은 혼자 남게 될 때를 대비하라는 누군가의 지속적인 속삭임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희순 씨는 좋아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말릴 일도 아니었다. 희순 씨의 눈길이 느껴졌는지, 남식 씨가 쑥을 다듬던 손으로 얼굴을 스윽 어루만져 주었다. 쑥 향이 콧속으로 훅, 퍼졌다. 남식 씨가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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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구요!” 우체부로부터 하숙방 앞에 웬 처녀가 서성거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교문을 나와 종종 걸음으로 마을로 가보니, 눈도 코도 입도 키도 몹시 작은, 처음 보는 여자가 희순 씨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나와서는 둘을 에워쌌다. 정혼한 여자가 오남식이라는 이름이라는 것을 새겨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남식이라는 처자와 혼사를 치르기로 했다고 희순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이 3년 전이었다. 전쟁전, 고향에서 양가 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희순이 통성명 할 새도 없이 막무가내로 가슴팍에 머리를 디밀고 달라붙어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여자를 겨우 떼어내며 물은 것이 “당신,누구요!”였고, 눈물범벅으로 딸꾹질까지 하며 여자가 대답한 말이 “임자, 처자야요!”였다. 그것은 희순 씨와 남식 씨가 나눈 첫 대화였다. 그날 밤, 은서가 생겼고, 이듬해 형서가, 그 이듬해 경서가 생겼다. 모두 연년생들이었다. 북쪽에 부모형제가 갈려 있는 처지에 혼례 같은 것은 없었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