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정지용과 길진섭의 북방여행 그리고 「화문행각」
글 정철훈 ㅣ 시인, 소설가, 문학저널리스트. 1959년생
시집 『빛나는 단도』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산문집 『내가 만난 손창섭』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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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 정지용(1902~1950)은 1940년 1월, 발이 꽁꽁 어는 영하 30도의 추위를 뚫고 ‘吉’(길)이라는 오랜지기(知己)와 함께 열흘 일정으로 북방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북방이란 평북 선천과 의주, 평양, 중국 단동의 오룡배(五龍背) 일원을 말한다. 정지용은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상과 동작은 물론 사투리까지 꼼꼼하게 메모했고 ‘吉’은 목탄으로 풍경과 인물을 스케치했던 모양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용은 1940년 1월 28일부터 2월 15일까지 1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吉’의 그림이 곁들어진 「畵文行脚(화문행각)」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연재한다.
평양에 나린 이후로는 내가 완전히 吉을 따른다. 따른다기 보담은 나를 일임해 버린다. 잘도 끌리어 돌아다닌다. 무슨 골목인지 무슨 동네인지 채 알아볼 여유도 없이 걷는다. 수태 만난 사람과 소개인사도 하나 거르지 않었지마는 결국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화문행각 7- 평양 1」 부분‘吉’이라고 불린 벗은 화가 길진섭(1907~1975)이다. 그러니까 정지용에게는 서첩여행이요,진섭에게는 화첩여행이었던 것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길진섭은 1921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후 미술에 뜻을 둔다. 하지만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경성에서 미술수업을 받다가 1932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경성에 정착한다. 길진섭은 1934년 이종우, 장발, 구본웅, 김용준등과 함께 양화단체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했고 정지용이 1939년 창간한 문예지 《문장》에 디자인 담당 편집위원으로 참여한다. 정지용의 수필엔 길진섭이 미술학도 시절의 감회를 더듬는 장면이 그려
져 있다.
누구 집 상점 2층에 먼지에 켜켜 쌓인 제전(帝展)에 패스했던 <모자(母子)>라는 유화와 그리다가 마치지 못하고 이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초상화와 그의 대폭소폭의 4, 5점을 꺼내어 보고서는 다시 단속할 의사도 없이 나오고 만다. 어떤 다방에 들러서는 정면에 걸린 졸업기 제작 일 점이 자기 승낙도 없이 걸린 이유로 경로를 추궁하는 나머지에 카운터에선 흰 쓰메에리 입은 청년과 다소 기분이 좋지 않아 나오기도 한다.- 위와 같음평양에서 부벽루로, 을밀대로 싸돌아다닌 두 사람이 어김없이 찾아든 곳은 길진섭의 단골 카페 라보엠이다. 라보엠에도 길진섭의 그림이 걸려있다. 부친 사후 5년 만에 정지용을 대동하고 평양에 온 그는 후끈하게 달떠 있다. 「화문행각」엔 두 사람의 각별한 친분과 예술적 공감대도 드러나 있다. 예컨대 정지용은 의주 통군정에 올랐어도 도무지 흥미를 갖지 않는 길진섭을 서운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꿈에서 같이 웃는 길(吉), 밉지 않은 취안(醉顔)’이라며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가 하면 ‘차표를 물리고 의주에서 술을 마시자는’ 그의 즉석 제안에 난감해하면서도 내심 즐기는 눈치다. 지용은 수필에 자신의 예술관도 슬쩍 내비친다. 여기엔 표지화 등을 통해 《문장》이 추구했던 문인화계열의 미학이 드러나 있다.
수심가는 순연히 백성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된 토속적 가요라고 볼 수밖에 없을까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리듬에서 툭툭 불거져 나둥그는 비애가 어딘지 남도 소리에서보다 훨씬 근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살얼음 아래 잉어처럼 소곳하고 혹은 바람에 향한 새매처럼 도사리고 부르는 토산 기생의 수심가는 서울서 듣던 것과도 다르다.- 「화문행각 8-평양 2」 부분문학평론가 김진희는 “정지용은 평양 기생의 수심가를 들으면서 이것이 남도와는 다르게 지배층을 위한 노래가 아니어서 토속적이며, 단순 소박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면서 “길진섭 역시 수묵의 단순한 필치를 통해 능라도의 풍경을 소박하고 절제된 풍경으로 표현함으로써 문인 수묵화의 전통을 살리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길진섭은 의주의 기생집에서나 평양의 카페에서나 틈만 나면 소묘화첩을 펼쳐 보이며 단연 주위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화문행각」을 꼼꼼히 읽어보면 지용은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묘사해 북방 여행의 주인공으로 부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행길 내내 안내를 맡은 ‘낙영이’, 의주 약방집 주인 ‘김 군’, 의주 기생 ‘화선이’와 ‘영산홍’, 평양 라보엠의 웨이트리스 등은 지용의 세필이 살려내지 않았다면 역사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무명씨에 불과했을 것이다.
선천, 의주, 평양까지 구경했으면 경성으로 귀경할 만한데, 두 사람은 방향을 다시 북으로 틀어 압록강 건너 단동으로 들어간다. 지용이 단동 신시가지 육번통 팔정목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삼종형(三從兄·팔촌 형)을 만나 하룻밤 회포를 푸는 동안 진섭은 단동 역전 일만(日滿) 호텔 하층 북향실에서 지용의 짐과 자신의 화구를 지키며 홀로 잠을 청한다. 지용은 홀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고 있는 삼종형의 하소연을 들으며 밤새 술을 통음하다가 큰조카 아이 구열(求烈)을 붙들고 눈물까지 흘리고 만다. 다음 날 아침, 지용은 진섭과 함께 단동에서 22㎞ 떨어진 오룡배 온천으로 향한다. 그는 차안에 마주 앉은 열두어 살 만주 아이와 엉터리 만주어로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지용은 그만큼 섬세하고 정겨운 인품의 소유자였다. 길진섭이 미처 화첩에 그리지 못한 스케치를 지용은 때로 머릿속에, 때로 수첩에 써넣으며 1940년 한·중 국경지대의 인물화와 풍속화를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선천의 지인 집에서 만난 네 살짜리 은희와 의주 기생집 아이 추월이다.
아무나 보고도 옙 할 까닭을 모르는 권리를 가진 은희는 큰아바지 보고나 서울선생님을 보고나 자기의 친절이 즉시 시행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르카래는데 와 그네!”하며 조그만 군조(軍曹)처럼 질타한다. 째랑째랑한 산뜻산뜻한 이 어린 군조한테 우리는 압도한다.- 「화문행각 2-선천 2」 부분
“오호, 끔찍이 춥수다이!”하며 들어서는 아이의 이름이 추월(秋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가 유난히 얼어 붉었는데 귓불이 흥창 익은 앵두처럼 흐물어져 안에서부터 터질까 싶다. 그림이나 글씨 한 점 없는 백로지로 하이얗게 바른 이 방 안에 추월이는 이제 그림처럼 앉았고 그리고 수줍다. (중략) “추월아 너 밖에 나가서 다시 얼어 오렴아.”- 「화문행각 5-의주 2」 부분
정지용은 나이 어린 은희와 추월의 앙증맞은 자태는 물론 ‘서울선생님’(지용)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구수하고 억센 평북 사투리를 수필에 담아 영원히 살려놓았다. 글에 혼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이걸 말하는 것일 게다. 문학아, 너도 저 북방의 영하 30도 쯤에서 다시 얼어 오렴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