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와 메마른 입술 사이, 정지용의 고향 옥천
그녀는 우아했고, 픽션의 세계에 어울렸지 -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의 만남
[특집을 기획하며]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와 전망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녀’와 인간의 미래 - 포스트휴먼의 윤리와 철학 휴먼 가늠자로서의 포스트휴먼 -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봇’까지, 과학소설의 진화 테크노포비아, 인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가 -영화로 시각화된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의 AI, 과학 기술의 발전 -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할 수 있을까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①항일문학을 완성한 ‘최후의 분대장’ - 나의 아버지 김학철 ② 맑고 깊고 높은 - 나의 아버지 박두진 ③임방울과 부케 - 나의 아버지 설창수 ④ “하루 두 끼를 굶더라도 한 줄 소설을 쓰자” - 나의 아버지 최태응
첫 번째｜추락한 이카로스와의 만남 두 번째｜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 줘* 세 번째｜구슬약 네 번째｜글을 쓰다
야구의 도입과 최초의 한글 야구규칙·용어집 『야구규칙』
대구,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북성로와 동성로
단편소설
필경사 조풍년
1972년 10월 17일 별안간 계엄령이 내려지자 세상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국회는 문을 닫았고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정부 비판에 앞장서온 야당 의원들은 줄줄이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침을 쏘며 저항할 만한 벌이 순식간에 씨가 마르고 말았다. 벌 소리가 사라진 자리는탱크들 차지였다. 그날 기습적으로 발표된 것은 계엄령만이 아니었다. 헌법개정안도 공표되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유신헌법’이라 불린 새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현저히 제한한 반면 행정부 수반에게는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다. 선거와 중임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이 땅에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속으로 피울음을 토하는 이도 있었고 김일성을 이기려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입에 거품을 무는 이도 있었지만 문제의 조항에서 문자적 오류를 발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조풍년이라 불리던 사내의 진짜 이름은 조풍연이었다. 바람 풍(風)에 멀리 흐를 연(演). 바람처럼 멀리멀리 흘러가라고, 부친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실제로 불란서 조계지에 한 조선인을내려주고 궐련을 피우다 전봇대에서 파닥이는 전단을 발견했을 때, 조의 부친은 일찍이 산타마리아호의 삼각돛을 부풀렸던 무역풍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회의 땅, 아메리카! 황금 골짜기 샌프란시스코!”
미국 서부에 정착할 이주노동자를 구하는 광고였다. 조의 부친이 전단을 떼어내 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은 “행운은 선착순”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따지고 자실 것 없이 곧장 와이탄으로 내달렸다. 구미 열강의 금융·상업 관련 건물이 즐비한 거리 한켠에는 ‘스탠다드 & 리치스’라는 미국 상사 상해 연락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의 부친이 샌프란시스코행 기선에 몸을 실은 것은 열흘 뒤였다. 뱃멀미로 피똥 지린 것만 빼면 부산까지의 여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사우스퍼시픽호는 ‘조선의 상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룻밤 묵고 중간 기착지인 호놀룰루로 떠날 예정이었다. 3등 칸에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은 갈매기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짐 꾸러미를 챙겨 갑판으로 올라갔다. 조의 부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재산인 인력거를 끌고서였다. 앞으로 석 달 동안 땅을 밟지 못하는 데다 지난 사흘간의 선상 생활이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울 정도로 쾌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상해는 자못 실망스러웠다. 부둣가에는 대리석 빌딩 대신 판잣집이 들어차 있고, 거리에는 자동차가 아닌 우마차만 가득했다. 곳곳에서 지린내 비슷한 냄새도 풍겨왔다. 가솔린 내와 우롱차 향이 오묘하게 섞인 상해의 공기가 벌써 그리울 지경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코를 실룩이던 조의 부친에게 뭐라 말을 건 사람은 중절모를 눌러쓴 코쟁이였다. ‘인 inn’이라는 단어로 짐작컨대 어느 객잔에 가려는 모양. 조의 부친은 상해의 조계지 구석구석을 누비며 주워들은 영어로 영업불가의 뜻을 전했다. “노 코레아, 본 차이나!” 코쟁이는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웃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손가락에 미국 지폐를 끼워 흔들며.코쟁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달리다 보니 역시 어느 객잔 앞이었다. 후한 품삯에 서양 담배를 팁으로 챙기고 악수까지 나눈 인력거꾼의 발걸음을 붙든 것은 객잔 문틈으로 흘러나오던 야릇한 방향(芳香)이었다. 꽃이 벌을 부르는 냄새. 조의 부친은 객잔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눈앞에 꽃밭이 펼쳐졌다. 앳된 여자 여럿이 탁자에 둘러앉은 채 코쟁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코쟁이 곁에 선 여인의 통역에. 김이 오르는 음식에 손 대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 미망인들의 모임 같달까. 서글픔을 애써 감추려는 눈빛에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각오가 교차했다.
혼자 저녁을 먹던 조의 부친을 부른 사람은 이번에도 중절모의 코쟁이였다. 손짓을 보아하니 합석을 권하는 듯. 미국 땅을 밟기도 전에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양 한 번 안 하는 것은 오랑캐나 할 짓. “노 코레아, 본 차이나!” 조의 부친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내 코쟁이가 “노 프라블럼!”하는 외침으로 기대에 부응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고.
이튿날 머릿속에 쐐기가 박히는 듯한 통증으로 눈을 떴을 때 조의 부친은 웬 처자와 나란히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웃통은 벗겨진 채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저간의 사정을 일깨워준 것은 처자의 머리맡에 접혀 있던 화선지였다. 거기 자신의 이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天下英雄 曹操 大將軍 後孫’
간밤의 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사진 한 장 보고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하러 하와이로 떠나는 처자들이라는 소리에 개들도 그런 식으로 짝을 짓지 않는다고 흥분한 것, 두 오라버니가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는 처자에게 오라버니라 부르라며 수작 건 것, 종이를 내오게 해서 필담을 나누다 통성명한 것까지 빠짐없이. 꿈이면 좋으련만 둘로 찢긴 채 나뒹굴고 있는 사진속에서 어느 조선 사내가 “꼼짝 마”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쪽창 너머로 조선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조조 후손의 얼굴은 썩 밝지 못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사우스퍼시픽호의 닻이 바닷물에 잠겨 있지 않을 거라는 얘기. 샌프란시스코는 물건너갔다는 말씀. 몸을 버렸으니 이젠 죽은 목숨이라고 울고 부는 처자, 간밤 처자의 배에 들어선 애의 이름은 조풍연. 바람 풍에 멀리 흐를 연. 바람처럼 멀리멀리 흘러가라는 염원이 담긴 이름. 하지만 사연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자꾸만 ‘풍년’이라 부르는 이름.
마음의 귀를 열면 꽃망울 터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던 1972년의 어느 봄밤, 다짜고짜 조의 팔을 틀어쥔 정체불명의 사내도 “조풍년 씨?”하고 물었다.
“나는 조풍연인데, 당신들은 누구요?”
조는 ‘연’자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조풍년 씨 고마 조용히 가입시다.”
두 사내 중 오른팔을 낚아챈 쪽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투가 위압적인 데다 팔을제압한 서슬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골목 어귀에 대기 중이던 지프로 끌려가기까지 마음의 귀를 열면 꽃망울 터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던 1972년의 어느 봄밤, 다짜고짜 조의 팔을 틀어쥔 정체불명의 사내도 “조풍년 씨?”하고 물었다.
“나는 조풍연인데, 당신들은 누구요?”
조는 ‘연’자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조풍년 씨 고마 조용히 가입시다.”
두 사내 중 오른팔을 낚아챈 쪽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투가 위압적인 데다 팔을제압한 서슬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골목 어귀에 대기 중이던 지프로 끌려가기까지 조가 내비친 저항의 표시는 “저기 신발이……”하고 중얼거린 게 고작. 슬리퍼 바람이긴 했지만 멍청한 소리였다. 멍청한 소리를 더 지껄이지 않기 위해 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잘못 골랐습니다. 나는 조풍연입니다.”
‘연’자에 힘을 줬음은 물론.
“법원 앞에서 대서소하는 조풍년 씨 아잉교?”
오른쪽 사내가 특유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법원 앞’이라는 말에 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라는 유일한 희망마
저 꺾이고 말았다. 다 알고 찾아 왔겠거니 싶어서였을까?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도 선선히 고개
를 끄덕였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해 하며.지프는 어느새 큰길로 접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왼쪽 사내가 부시럭거리며 조의 머리에 뭔가를 씌웠다.
“쪼매만 참읍시다.”
말은 오른쪽에서 들렸다.
앞이 보이지 않자 조의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교수대 밧줄에 머리를 들이밀면 이런 기분일까? 전에 맛본 적 없는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쥐었다. 펄쩍 뛰어오른 심장이 목젖에 걸린 듯 숨을 쉴 수 없었고, 겨우 숨을 뱉으면 목구멍 깊은 곳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듯했다. 정신줄을 놔버리지 않은 것은 봉지에 밴 냄새 덕분이었다. 호떡을 떠올리게 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 호떡이라
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조였다. 새삼 생에 대한 갈망이 간절해졌다.
조는 침착하려 애썼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첩보 영화의 주인공처럼 속으로 하나, 둘……숫자를 세며 좌회전과 우회전의 타이밍과 횟수를 머릿속에 새겨 어디쯤인지 가늠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의 신경은 온통 봉지 주둥이 아래로 쏠렸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사내가 신고 있던 등산화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양복바지에 등산화라니, 야산에 묻어버리기
라도 하려는 걸까?
두려운 상상을 떨쳐내듯 조는 고개를 외로 틀었다. 다행히 왼쪽 사내는 구두였다. 반질반질 광을 낸 옥스퍼드화. 지프 짐칸에 야전삽을 실으면서 고집할 만한 신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편지가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앞이 캄캄해지며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내가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편지를 파자마 주머니에 황급히 집어넣은 것도, 순대가 당긴다는 말에 그 차림 그대로 집을 나선 것도. 모든 게 아내 탓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자니 마구 날뛰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그래도 문제의 편지가 있는 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5년 전, 한국말과 일본말을 반씩 섞어 말하던 한 사내가 대서소로 찾아와 건넨 편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몰래 꺼내보던 편지. 그것은 북에서 온 편지였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필경사 조풍년
김경욱 ㅣ 소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1971년생
소설 『위험한 독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 『동화처럼』『야구란 무엇인가』 『개와 늑대의 시간』 등
그런데 첫 글자가 좀 이상했다. 그곳의 지명은 한자로 ‘藥山’인데 바위에 윤곽을 드러낸 글자는‘樂山’이었다. 풀초 변이 빠졌음을 지적하자 부친은 “풀이 지천인데 뭣 하러……”라며 껄껄 웃었다.한중의 석문에 ‘滾雪’ 대신 ‘袞雪’이라 적고 “물은 여기 이렇게 많잖은가!” 했다는 조조처럼. 말하자면 그것은 부자간에만 통하는 암호인 셈이었다. 아버지의 편지가 틀림없었다. 말미에 슬쩍 던진, “대는 이었는지 모르겠다”는 물음 역시 아버지다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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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조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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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년이라 불리던 사내의 진짜 이름은 조풍연이었다. 바람 풍(風)에 멀리 흐를 연(演). 바람처럼 멀리멀리 흘러가라고, 부친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실제로 불란서 조계지에 한 조선인을내려주고 궐련을 피우다 전봇대에서 파닥이는 전단을 발견했을 때, 조의 부친은 일찍이 산타마리아호의 삼각돛을 부풀렸던 무역풍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회의 땅, 아메리카! 황금 골짜기 샌프란시스코!”
미국 서부에 정착할 이주노동자를 구하는 광고였다. 조의 부친이 전단을 떼어내 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은 “행운은 선착순”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따지고 자실 것 없이 곧장 와이탄으로 내달렸다. 구미 열강의 금융·상업 관련 건물이 즐비한 거리 한켠에는 ‘스탠다드 & 리치스’라는 미국 상사 상해 연락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의 부친이 샌프란시스코행 기선에 몸을 실은 것은 열흘 뒤였다. 뱃멀미로 피똥 지린 것만 빼면 부산까지의 여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사우스퍼시픽호는 ‘조선의 상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룻밤 묵고 중간 기착지인 호놀룰루로 떠날 예정이었다. 3등 칸에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은 갈매기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짐 꾸러미를 챙겨 갑판으로 올라갔다. 조의 부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재산인 인력거를 끌고서였다. 앞으로 석 달 동안 땅을 밟지 못하는 데다 지난 사흘간의 선상 생활이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울 정도로 쾌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상해는 자못 실망스러웠다. 부둣가에는 대리석 빌딩 대신 판잣집이 들어차 있고, 거리에는 자동차가 아닌 우마차만 가득했다. 곳곳에서 지린내 비슷한 냄새도 풍겨왔다. 가솔린 내와 우롱차 향이 오묘하게 섞인 상해의 공기가 벌써 그리울 지경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코를 실룩이던 조의 부친에게 뭐라 말을 건 사람은 중절모를 눌러쓴 코쟁이였다. ‘인 inn’이라는 단어로 짐작컨대 어느 객잔에 가려는 모양. 조의 부친은 상해의 조계지 구석구석을 누비며 주워들은 영어로 영업불가의 뜻을 전했다. “노 코레아, 본 차이나!” 코쟁이는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웃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손가락에 미국 지폐를 끼워 흔들며.코쟁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달리다 보니 역시 어느 객잔 앞이었다. 후한 품삯에 서양 담배를 팁으로 챙기고 악수까지 나눈 인력거꾼의 발걸음을 붙든 것은 객잔 문틈으로 흘러나오던 야릇한 방향(芳香)이었다. 꽃이 벌을 부르는 냄새. 조의 부친은 객잔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눈앞에 꽃밭이 펼쳐졌다. 앳된 여자 여럿이 탁자에 둘러앉은 채 코쟁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코쟁이 곁에 선 여인의 통역에. 김이 오르는 음식에 손 대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 미망인들의 모임 같달까. 서글픔을 애써 감추려는 눈빛에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각오가 교차했다.
혼자 저녁을 먹던 조의 부친을 부른 사람은 이번에도 중절모의 코쟁이였다. 손짓을 보아하니 합석을 권하는 듯. 미국 땅을 밟기도 전에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양 한 번 안 하는 것은 오랑캐나 할 짓. “노 코레아, 본 차이나!” 조의 부친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내 코쟁이가 “노 프라블럼!”하는 외침으로 기대에 부응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고.
이튿날 머릿속에 쐐기가 박히는 듯한 통증으로 눈을 떴을 때 조의 부친은 웬 처자와 나란히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웃통은 벗겨진 채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저간의 사정을 일깨워준 것은 처자의 머리맡에 접혀 있던 화선지였다. 거기 자신의 이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天下英雄 曹操 大將軍 後孫’
간밤의 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사진 한 장 보고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하러 하와이로 떠나는 처자들이라는 소리에 개들도 그런 식으로 짝을 짓지 않는다고 흥분한 것, 두 오라버니가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는 처자에게 오라버니라 부르라며 수작 건 것, 종이를 내오게 해서 필담을 나누다 통성명한 것까지 빠짐없이. 꿈이면 좋으련만 둘로 찢긴 채 나뒹굴고 있는 사진속에서 어느 조선 사내가 “꼼짝 마”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쪽창 너머로 조선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조조 후손의 얼굴은 썩 밝지 못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사우스퍼시픽호의 닻이 바닷물에 잠겨 있지 않을 거라는 얘기. 샌프란시스코는 물건너갔다는 말씀. 몸을 버렸으니 이젠 죽은 목숨이라고 울고 부는 처자, 간밤 처자의 배에 들어선 애의 이름은 조풍연. 바람 풍에 멀리 흐를 연. 바람처럼 멀리멀리 흘러가라는 염원이 담긴 이름. 하지만 사연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자꾸만 ‘풍년’이라 부르는 이름.
마음의 귀를 열면 꽃망울 터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던 1972년의 어느 봄밤, 다짜고짜 조의 팔을 틀어쥔 정체불명의 사내도 “조풍년 씨?”하고 물었다.
“나는 조풍연인데, 당신들은 누구요?”
조는 ‘연’자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조풍년 씨 고마 조용히 가입시다.”
두 사내 중 오른팔을 낚아챈 쪽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투가 위압적인 데다 팔을제압한 서슬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골목 어귀에 대기 중이던 지프로 끌려가기까지 마음의 귀를 열면 꽃망울 터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던 1972년의 어느 봄밤, 다짜고짜 조의 팔을 틀어쥔 정체불명의 사내도 “조풍년 씨?”하고 물었다.
“나는 조풍연인데, 당신들은 누구요?”
조는 ‘연’자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조풍년 씨 고마 조용히 가입시다.”
두 사내 중 오른팔을 낚아챈 쪽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투가 위압적인 데다 팔을제압한 서슬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골목 어귀에 대기 중이던 지프로 끌려가기까지 조가 내비친 저항의 표시는 “저기 신발이……”하고 중얼거린 게 고작. 슬리퍼 바람이긴 했지만 멍청한 소리였다. 멍청한 소리를 더 지껄이지 않기 위해 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잘못 골랐습니다. 나는 조풍연입니다.”
‘연’자에 힘을 줬음은 물론.
“법원 앞에서 대서소하는 조풍년 씨 아잉교?”
오른쪽 사내가 특유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법원 앞’이라는 말에 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라는 유일한 희망마
저 꺾이고 말았다. 다 알고 찾아 왔겠거니 싶어서였을까?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도 선선히 고개
를 끄덕였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해 하며.지프는 어느새 큰길로 접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왼쪽 사내가 부시럭거리며 조의 머리에 뭔가를 씌웠다.
“쪼매만 참읍시다.”
말은 오른쪽에서 들렸다.
앞이 보이지 않자 조의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교수대 밧줄에 머리를 들이밀면 이런 기분일까? 전에 맛본 적 없는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쥐었다. 펄쩍 뛰어오른 심장이 목젖에 걸린 듯 숨을 쉴 수 없었고, 겨우 숨을 뱉으면 목구멍 깊은 곳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듯했다. 정신줄을 놔버리지 않은 것은 봉지에 밴 냄새 덕분이었다. 호떡을 떠올리게 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 호떡이라
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조였다. 새삼 생에 대한 갈망이 간절해졌다.
조는 침착하려 애썼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첩보 영화의 주인공처럼 속으로 하나, 둘……숫자를 세며 좌회전과 우회전의 타이밍과 횟수를 머릿속에 새겨 어디쯤인지 가늠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의 신경은 온통 봉지 주둥이 아래로 쏠렸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사내가 신고 있던 등산화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양복바지에 등산화라니, 야산에 묻어버리기
라도 하려는 걸까?
두려운 상상을 떨쳐내듯 조는 고개를 외로 틀었다. 다행히 왼쪽 사내는 구두였다. 반질반질 광을 낸 옥스퍼드화. 지프 짐칸에 야전삽을 실으면서 고집할 만한 신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편지가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앞이 캄캄해지며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내가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편지를 파자마 주머니에 황급히 집어넣은 것도, 순대가 당긴다는 말에 그 차림 그대로 집을 나선 것도. 모든 게 아내 탓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자니 마구 날뛰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그래도 문제의 편지가 있는 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5년 전, 한국말과 일본말을 반씩 섞어 말하던 한 사내가 대서소로 찾아와 건넨 편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몰래 꺼내보던 편지. 그것은 북에서 온 편지였다.
(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