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낙화落花

영국의 시 축제들

시인은 청진기, 아픔을 듣고 붉은 꽃을 처방한다

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이야기꾼의 운명, 이야기의 힘

SNS는 눈, 유튜브 문학은?

“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자동차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모든 순간들이 한국문학이고 ≪현대문학≫이다

하필이면

김점순 어머니

가면 오리, 오면 십리

티브이를 보다가,뼈 펴는 소리 포스터

행자가 사라졌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불꽃놀이

「동시대 문학의 시간착오와 불안」에 부쳐

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밀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LOVE NEVER FAILS

“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역사가 인류에 대해 말해주는 것

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통째로 얼지 않으려고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터키인들도 ‘타는 목마름’을 아는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9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노트 위 패스포트

영국의 시 축제들

- 윈체스터 시 축제(Winchester Poetry Festival)

글·사진 최정례 ㅣ 시인, 1955년생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레바논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영문 시선집 Instances, 평론집 『시여, 살아있다면 힘껏 실패하라』 『백석 시어의 힘』 등

 

 

윈체스터 시 축제에 가려고 워털루역에 와보니 기차가 연착, 1시간이나 늦게 떠난다고 한다. 어떻게 문명국이라는 영국에서 예고도 없이 이런 일이 이렇게 흔하게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에어비앤비 주인이 윈체스터역으로 마중 나오겠다고 했는데 약속 시간에 닿지 못할까 봐 초조했다. 와이파이가 원활하지 않아 휴대폰이 작동하지 않았고 에어비앤비 주인과 연락하려고 기록을 찾아보려 하니 연락처가 없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데 왜 이럴 때는 이메일 비밀번호까지 생각이 안 나나? 

어제 런던 대학에서 있었던 시의 날 번역 워크숍에서 패널 토론자로 참석했던 케이트의 주선으로 내 시를 읽었고 그들의 칭찬에 취해 늦은 밤까지 회식에 참석, 술 마시고 열렬히 떠들다가 노리치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새벽 한 시였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런던 리버풀역까지 서둘러 오느라 에어비앤비 숙소 연락처를 프린트하지 못한 채 그냥 나온 것이다. 윈체스터 시 축제는 기차와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길치인 내가 혼자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시 축제 중 가장 풍성한 축제라는 말을 전해 듣고 꼭 가고 싶었다. 가는 길을 모색하던 중 마침 나의 낭독에 와서 알게 된 청년 제이미 오스본(Jamie Osborn)이 그 축제에 자원봉사 하러 간다기에 따라나선 것이다. 그는 시를 쓰면서 독일어 번역도 하는 청년으로 몇 번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져 그를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윈체스터는 런던 남서쪽 방향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의 주도로 역사가 깊은 도시다. 노리치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 런던 리버풀역에 내려 전철로 갈아타고 다시 워털루역에서 윈체스터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그런데 워털루역에 와보니 전광판 앞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늦게 도착한 기차에 우르르 몰리더니 재빨리 올라탔고 난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붐비는 기차 통로에 서서 노트북

▲ 윈체스터에서 머문 에어비앤비의 내부  


을 꺼내 기록을 찾아 연락하려고 했으나 결국 불통, 당황하여 온몸이 땀에 절었다. 기차 통로에서 서로 부딪치면 땀내를 풍길까 두렵기도 했고, 휴대폰만 믿고 기록을 저장하지 않은 채 급히 나온 내 실수를 탓하며 윈체스터역에 내리니 에어비앤비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인사하니 영국에서 기차 연착은 흔히 있는 일이라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 짐을 차에 실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나와 숙소가 다른 제이미의 것까지 짐이 많으니 차로 실어다 주겠다고 한다. 제이미를 먼저 내려 주고 도착한 숙소는 완벽했다. 새하얀 리넨 시트, 엷은 비둘기색 카펫, 너무나 멋진 정원과 부엌, 그녀의 직업은 정원사라 했고 시에 관심도 많으며 혼자 사는 친정 엄마의 집 2층 방을 에어비앤비로 빌려주며 모친을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시 축제 때문인지 윈체스터 시내의 호텔은 이미 예약이 다 찼고 남은 민박집들도 비싼 것들만 남아 있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이 집을 겨우 예약한 것이었는데 행운이 내게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짐을 풀자마자 곧장 시 축제 장소로 갔다. 첫 낭독자는 이언 맥밀런(Ian McMillan)이라는 사람이었다. The greatest poetry performer란다. 청중이 꽉 차 앉을 데도 없는데 시를 읽기도 전에 청중 전체를 웃긴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왜 웃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이 사람 영어는 들리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일까? 저 사람의 특이한 발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코믹한 말이 내게는 낯설기 때문일까? 열심히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이 하나로 뭉쳐 웃고 손뼉 치는데 나만 홀로


외계인이었다. 앞뒤 맥락을 모른 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마디는 “My great great great great great grand father is so old”였다. 이런 식으로 웃기는 퍼포먼스의 연속이라는 인상만 갖고 밖으로 나왔다. 날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로 향했는데 계속 낯선 길만 나왔다. 사거리에서 엉뚱한 길을 선택한 것 같았다. 코너를 연속해서 꺾으며 걸었는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텅 빈 벌판이 나왔다. 멀리 체육관 건물이 눈에 띄어 들어가서 물었는데 도저히 숙소로 돌아갈 기운이 없었다.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어렵게 찾아온 길인데 겨우 이러려고 왔나 싶은 생각에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잠들었기 때문일까 꿈에 돌아가신 부모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는 꿈을 꾸다 깨어났는데 다리에 쥐가 나고 일어나 앉으니 온몸으로 경련이 퍼졌다. 거의 울다시피 하다가 경련은 진정이 되었는데 다시 잠들지 못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왜 이렇게 시가 잘 들리는가, 파스칼 프티(Pascale Petit)의 시집 『마마 아마조니카 Mama Amazonica』, 병석에 누운 그녀의 엄마 이야기인데 돌아가신 모친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세상에 남이 읽는 시를 듣고 눈물이 날 지경이라니! 이런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시 축제가 밥 먹을 시간도 안 주고 계속 연타 연타인가, 한 시간 동안 대체로 세 명의 시인이 낭독하고 입장료 11파운드, 읽고 나서 그 시집을 사게 되면 그것도 20~30파운드, 하루에 4~5회 3일간 전부 참석하고 시집을 사면 거덜이 날 수밖에 없다. 가난하지만 시를 좋아하는 청년 제이미가 왜 이 축제에 자원봉사를 하러 왔는지 알 것도 같다. 그래야만 이 축제 참가비를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시 축제 참가란 몸도 정신도 거덜이 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는다. 각자 알아서 시간 내서 사 먹거나 준비해 온 간식을 먹거나 로비에서 파는 커피와 스낵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병이나 쓰러질 지경이다. 그러나 오늘은 시가 잘 들려 행복하다. 니콜라 마지로프(Nikola Madzirov), 마케도니아에서 온 난민의 후손이다. 그가 시를 읽는데 언젠가 터키 해안가에 숨진 채 엎어져 있던 5살짜리 어린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채 엎어져 굳어있던 그 아이가 남의 아이가 아닌 것 같다. 나를 비롯해 이 장소에 모여든 사람들, 세상 모든 이들이 길 떠난 여행자이며 자기가 살 집을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집도 나라도 없는 존재다. 어젯밤 길을 잃고 헤매다 여기가 어딘지 묻던 내 모습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객석의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잠깐 훌쩍거렸다. 내 옆에 앉은 모르는 여자가 내 팔을 쓰다듬으며 오, 진정해 그런다. 이 시를 번역하리라.

  

먼 것은 다 집이다 내가 꿈꾸고 있는, 

먼 것은 엄마 목소리 

저녁 먹으라고 날 부르는, 그러나 나는 밀밭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멀다 마치 골대를 빗겨나간 공이 

하늘을 향해 가듯이, 우리는 살아 있다 

마치 우리가 들여다볼 때만 정밀해지는 

온도계처럼. 

 
저 먼 실재가 매일매일 내게 묻는다 

마치 여행의 중간에 나도 모르는 여행자가 나를 깨우며 

이 버스 맞지요? 라고 물어보듯이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그럼요, 그러나 사실은 나도 몰라요. 

모든 병을 찾아내서 인내 끝에 치료제를 만들고 난 다음에야 

그곳을 떠나기를 원하는 조부모들이 사는 도시를 

나는 모른다 

 
나는 갈망의 언덕 위에 우리 집이 있기를 꿈꾼다 

바다의 파도가 어떻게 우리의 추락과 사랑의 

심박동 곡선을 끌고 다니는지 보려고 

사람들이 가라앉지 않으려고 믿음을 갖고 

잊혀지지 않으려고 발길을 내딛는지 보려고 

 
먼 것은 폭풍으로부터 우리를 가려주는 오두막이다 

사냥꾼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숨겨주는 오두막이다 

굶주림 때문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큰 외로움 때문에 사냥꾼이 된 그 

 
그 먼 순간들이 매일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은 창문입니까? 이것은 인생입니까? 그러면 나는 말한다

네, 그러나 사실은 나는 모릅니다 

하나의 하늘이야라는 비명 없이 

새들이 말하기 시작할 것인지 아닌지를 나는 모릅니다.
 

― 니콜라 마지로프 시 「나는 모른다」 전문, 번역 최정례

  

*

  

서퍽(Suffolk) 지방의 바닷가 마을 올드버러(Aldeburgh)에서 하는 시 축제에 이번에는 시인 조지 서티스(George Szirtes) 부부가 운전하는 차에 동승하여 가기로 했다. 조지 서티스는 T. S. 엘리엇상 수상자로 이 지역 최고의 시인이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태양빛도 아름답고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 들판이 좋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 살고 있는 당신들은 행운아다라고 했더니 익

▲ 여우가 출현한 밤 운전길 

숙해서 잊고 있었는데 네 눈을 통해 다시 보게 되니 자기들도 행복하다고 했다. 작은 마을 올드버러 바닷가에는 전망대처럼 보이는 앙증스러운 건물이 해변에 외따로 솟아 있었는데 거기 나선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며 하이쿠를 하나씩 짓고 내려오라는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하이쿠를 좋아하는지 영어로 5·7·5 음절을 지으려니 쉽지 않을 텐데 시 축제의 바닷가에 온 사람들이 거기 들러 하나씩 지어 커다란 저금통 같은 나무상자 속에 밀어 넣고 내려온다. 조지가 고심하는 듯하더니 5·7·5 음절로 시를 지어 밀어 넣었고, 나도 따라서 3행시를 지어 웃으며 밀어 넣었다. 갖가지 재밋거리를 만들어 즐겁게 살고자 하는 이곳 사람들, 3일 내내 계속되는 시 축제 전부를 참석하고 싶었지만 돌아갈 교통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샤샤 덕데일의 발표와 조지의 번역에 관한 발표만 참석할 수밖에 없다. 돌아오는 길은 캄캄했다. 조지 부인 클라리사(Clarissa)가 캄캄한 들판 길을 운전하고 나는 뒷자리에서 주먹만 하게 빛나고 있는 별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자리에서 앗, 여우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로를 가로질러 슬쩍 여우 한 마리가 가로질러 갔다고 한다. 나를 위해 다시 한 번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여우는 다시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조지 부부와 작별인사를 위한 점심 약속이 있었다. 지난주 우리가 올드버러 시 축제에 다녀오면서 보았던 여우 생각이 났다. 끄적거렸다. “내가 놓친, 본적 없는 여우에 대하여 쓰고 싶다.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동안 난 들판 위에 떠도는 별을 보고 있었다. 내가 못 본 그 여우를 잊을 수 없다. 여우가 돌아와 한 편의 시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 여우의 시가 내 서투른 외국어, 내가 모르는 말의 무례함을 덮어줬으면 좋겠다.” 잠이 안와 한밤에 일어나 여우를 생각하는 짧은 글을 카드에 적어 그에게 전했는데 그들이 내게 준 시와 그림도 그 여우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치가 있게 된 것인지 놀랍고 기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위해 써준 그의 시와 그림을 받아들고 번갯불에 맞은 것처럼 놀랍고 기뻤다.

 

조지가 쓴 여우의 시와 클라리사의 그림   

 

하늘에서 윤나는 붉은 여우가 구름 위에서 달리기를 배운다 

붉은 노을의 시간이 거대한 무리 속에서 사냥을 하느라 지나간다. 

그때 그들 한 쌍의 날개를 찾아내고는 축축한 공기 뚫고 도약한다. 

공포와 절망 가득한 삶은 새들이 이끌어 가라고 내치면서. 

그러나 시인들은 운전하는 동안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여우를 본다. 

이것이 왜 새들은 죽기도 하지만 시인들은 살아남는지의 이유다. 

― 조지 서티스 시 「하늘 여우(The Sky Fox : For Jeongrye Choi)」 전문, 번역 최정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