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낙화落花

영국의 시 축제들

시인은 청진기, 아픔을 듣고 붉은 꽃을 처방한다

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이야기꾼의 운명, 이야기의 힘

SNS는 눈, 유튜브 문학은?

“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자동차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모든 순간들이 한국문학이고 ≪현대문학≫이다

하필이면

김점순 어머니

가면 오리, 오면 십리

티브이를 보다가,뼈 펴는 소리 포스터

행자가 사라졌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불꽃놀이

「동시대 문학의 시간착오와 불안」에 부쳐

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밀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LOVE NEVER FAILS

“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역사가 인류에 대해 말해주는 것

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통째로 얼지 않으려고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터키인들도 ‘타는 목마름’을 아는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9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글밭단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박상영 ㅣ 소설가, 1988년생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등

평소에 나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고백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오늘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고백을 해볼까 한다.
스무 살의 나, 뉴욕에 도착했다. 스물하나의 나, 뉴욕을 떠나며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허세에 찌들다 못해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두 문장은 까고 보면 별것도 아닌 우연들의 연속에 불과했다. 지옥 같았던 지방 소도시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열아홉의 나는 수십 개의 대학 원서를 부적처럼 뿌려댔고, 그중 운 좋게 한 대학에 합격해 상경에 성공했다. 아름답고 현대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성인의 삶이 이어질 거란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배치표에 맞춰 선택한 전공은 나와 잘 맞지 않았고, 사람들과는 겉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잘 모르는 (심지어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셨고, 낮과 밤의 경계를 상실해버렸으며, 자주 수업을 빠졌고, 매일 뭔가 재밌는 일이 펼쳐질 것이라 믿었지만 실은 어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첫 번째 학기를 학사경고로 마치고 난 후,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휴학계를 냈으며, 3개월 동안 투잡을 뛰며 돈을 벌었다.
그해의 12월, 나는 20년 동안 모아놓았던 세뱃돈과, 2학기의 등록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을 들고, 뉴욕에 도달하였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도피유학을 떠나 어학연수 코스를 밟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떠난 곳에서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제대로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 살았지만 월세는 비쌌고, 준비해 간 돈은 금방 동나 버렸고, (무허가 일자리였기에) 최저시급보다도 적은 돈을 받으며 또다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갔다. 다른 것들도 다 참기 힘들었지만 정말 참기 힘들었던 것은 모국어에 대한 갈증이었다. 한국말로 된 책을 너무 읽고 싶어서 코리안 타운 한인서점으로 향했고, 너무 비싸 살 수 없었던 단행본 대신, 5,000원짜리 ≪씨네21≫을 사와 겉장이 찢어질 때까지 읽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겠다고 여기까지 와서는 그러고 있는 내가 웃기고, 그런 웃긴 나를 보며 내가 얼마나 모국어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에도 방학 마지막 날 몰아 쓰곤 했던 일기를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매일 몇 장씩 써 내려갔다. 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감정의 쓰레기통을 보며, 내가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글쓰기는 나의 도피처이자, 거울이었고, 나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뉴욕 체류의 막바지, 나는 없는 돈을 긁어모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빛을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뉴욕의 야경을 보며 나는 내 인생만이 모노크롬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온통 아름다운 가운데 내가 싫었고, 무엇보다도 나의 언어로, 가장 예리한 언어로 나에 대해서, 나의 감정과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예정보다 일찍 (비행기 스케줄을 바꿔가면서까지) 내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의 언어로 내 마음 담을 곳이 생기면 불빛 가득한 이곳에 돌아오자고 마음먹으며.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30대가 되었고, (별 볼 일 없지만) 내 책도 한 권 갖게 되었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간신히 내 밥벌이는 하고 살며, 꼬박 12년 만에 다시 뉴욕에 와 있다. 심지어 오늘은 그때의 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전망대 한 바퀴를 쭉 돌았다. 스무 살 때 봤던 그 불빛과 이 불빛이 도저히 같은 불빛일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나는 또다시 그때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다. 영원히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불빛들을 보고 싶은데 아직은 더, 더 할 말이 많이 남은 것 같고, 더 정확히 표현해야만 하는 감정들이 남아 있는 것만 같고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부정해도 또다시 이곳을 꿈꾸며 내가 잘 아는 어떤 곳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