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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 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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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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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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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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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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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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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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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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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글 김도형 ㅣ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1961년생
저서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 연구』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 이봉창』 등

 

중국어와 영어로 번역된 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선포하고, 동양의 평화와 인류의 공영을 위해 반드시 독립이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밝힌 문서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면서 역사적인 3·1운동의 막이 열렸고 전국적으로 만세시위에 돌입하게 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세 달 동안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하였고, 중국·러시아·미주 등 국외 한인사회에도 전달되어 그곳에서도 민족 독립을 외쳤다. 그렇기 때문에 「3·1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3·1운동의 사상과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선포된 「3·1독립선언서」가 어떠한 경로로 국외로 전파되어 국제사회에 알려졌는가, 한국민의 독립의지와 정신이 담겨있는 「3·1독립선언서」가 어떻게 국외에 전파되어 국제사회에 어떻게 알려질 수 있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3·1독립선언서」의 국외 반출과 유통과정은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최초로 「3·1독립선언서」가 해외에 알려진 것은 중국에서부터였다. 최남선이 기초한 「3·1독립선언서」는 집필이 완료된 직후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3·1운동의 추진 주체들은 한국민이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최린에게 맡겨진 독립선언서 원고본은 필사되어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 선언의 취지와 정당성을 알렸다. 이 같은 내용은 3·1운동을 외부 세계에 알리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던 현순이 후일 쓴 『현순자사(玄楯自史)』라는 자서전에 전하고 있다. 현순은 1919년 2월 24일 용산역을 출발하여, 27일 오후 중국 톈진[天津]에서 최창식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향했고, 3월 1일 오후 7시경에 상하이 북역[北站]에 도착했다. 

현순과 같이 망명한 최창식이 「3·1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당시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보여 주었다. 최창식은 “최남선의 저작인 「독립선언서」를 국산지(國産紙)에 세서(細書)하야 할지작절(割紙作絶)하야 회중(懷中)에 품고 온 것을 다시 해절부합(解絶符合)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국산지’ 즉 ‘한지(韓紙)’를 잘라서 접어 가슴에 품고 와서, 이것을 펼쳐서 다시 붙였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조동호로 하여금 중국어로 번역하게 하였으며, 현순과 이광수는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3월 5일 중국신문에 3·1운동 발발 소식이 실리자, 현순을 비롯한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3월 8일부터 중국어와 영어로 번역된 「3·1독립선언서」를 각 신문사로 전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중국 신문사에 배포된 「3·1독립선언서」는 인쇄본이 아니라 최창식이 베껴온 필사본을 중국어와 영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점이다. 최창식이 필사한 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되기 전의 것으로서 최종본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보(時報)≫ 1919년 3월 9일 자에는 “조선독립국민단 대표 손병희·김선주(필자 주-길선주)”로 실려있는 등 대부분의 중국신문에는 독립선언서의 대표자가 손병희·이상재·길선주 3인으로 되어 있었다. 그 후 「3·1독립선언서」 인쇄본의 중국어 번역본 전문은 ≪익세보(益世報)≫ 1919년 3월 11일 자에 게재되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해당 독립선언서는 안중근의 동생 안우근(安又根)이 1919년 3월 4일에 중국의 언론사에 편지 한 통과 동봉하여 보냈다고 한다.

  

구두 뒤축에 감춰 외부세계로 전달된 「3·1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가 어떻게 국외로 전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국내에 있었던 미국인 광산업자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가 외부에 전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승하하자 테일러가 국내 AP통신사(만국연합통신사)의 통신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의 부인이 입원한 세브란스병원에 숨겨진 「3·1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William W. Taylor)에게 주었다. 그리고 동생 윌리엄 테일러는 선언서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가서 그것을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앨버트 테일러의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가 쓴 『호박 목걸이 Chain of Amber』라는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가를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3·1운동과 그것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3·1독립선언서」가 외부 세계에 최초로 전달되었다고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호박 목걸이』에 따르면 메리 테일러는 아기를 낳기 위해 1919년 2월 27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다음 날인 2월 28일 아들 브루스 티켈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를 낳았다. 그녀가 아기를 낳고 의식을 회복한 날, 병원 밖에서는 비명소리와 총성이 들렸고, ‘만세, 만세’를 외치는 커다란 함성도 들렸다. 3월 1일 그녀의 남편 앨버트 테일러가 아들을 보려고 하다가, 침대 속에 감추어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대한독립선언문이군!”이라고 놀라서 소리를 쳤다. 메리 테일러가 아들을 낳고 의식을 회복하는 사이에 간호사가 「3·1독립선언서」 뭉치를 메리 테일러의 침대 속에 감추었던 것이다. 갓 AP통신의 통신원이 된 메리의 남편은 「3·1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흥분하여, 바로 그날 밤 동생 윌리엄 테일러에게 그가 쓴 기사와 함께 선언서를 구두 뒤축에 감추어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가게 하였다.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3·1독립선언서」의 국외 반출 과정에 대해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었던 한인신문 ≪신한민보≫ 1919년 4월 8일 자는 ≪새크라멘토 비 Sacramento Bee≫ 발행인 맥클래치(V. S. McClatchy)가 「3·1독립선언서」를 “한국 서울을 떠날 때 구두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AP통신에 알려 세계 각국에 전하였다”고 한다. AP통신원 앨버트 테일러의 동생과 똑같은 방식으로 맥클래치가 독립선언서를 보냈다는 것이다. 

맥클래치는 1918년 가을 원동특별통신원의 책임을 맡아 극동으로 왔고, 1919년 2월 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울로 들어와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이때 3·1운동이 일어났다. 맥클래치는 서울 조선호텔에 체재하면서 자동차를 몰아 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시찰하는 등 적극적으로 취재를 하였다. 또한 미국 상원의원 기록에도, “맥클래치는 이 시위가 일어났을 당시 서울에 가 있었는데, 그는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미국으로 가지고 돌아온 많은 전령(傳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추측하건데 AP통신사 서울 통신원 테일러와 그의 동생이 3·1운동 당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기 위해 3월 4일 서울을 떠난 맥클래치에게 「3·1독립선언서」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호박 목걸이』에서 알려진 것 외에 「3·1독립선언서」를 해외로 전달하였다는 사람이 또 있다.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현장 사진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사진으로 담아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던 캐나다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이다. 2월 28일 저녁 한 학생이 스코필드의 집에 와서 「3·1독립선언서」 한 장을 전해주면서, “독립선언문의 사본이 최대한 빨리 백악관에 보내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스코필드는 그 학생에게 “다음 날 미국으로 출발하는 내 친구가 있다며 신속한 전달을 약속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그가 받은 독립선언서를 어떻게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 스코필드의 활동상을 감안하면, 독립선언서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외부 세계에 전달하였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미국 언론에 실린 최초의 영문 「3·1독립선언서」

 

국제사회에도 한국민이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사실과 「3·1독립선언서」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자 ≪뉴욕타임스 New York Times≫에 「한국인들 독립을 선언하다(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제목으로 만세시위 상황과 일제의 대응에 대해 보도했다. 그리고 「서울, 3월 12일, AP통신」으로 「3·1독립선언서」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서울발, AP통신”이라고 하면, 서울에 있는 AP통신원 앨버트 테일러가 「3·1독립선언서」의 핵심적인 내용을 작성해서 보낸 것이 확실하다. 『호박 목걸이』에 쓰인 것과 같이, 앨버트 테일러는 그의 동생을 도쿄로 보내 미국에 있는 AP통신사에 기사를 송전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3월 4일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간 맥클래치가 앨버트 테일러의 기사를 AP통신사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미주 최초로 「3·1독립선언서」 전문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게재된 것은 하와이의 영자신문인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Honolulu Advertiser≫ 1919년 3월 28일 자이다. 제1면에 「한국 독립선언서 공개되다(Korean Independence Declaration Bared)」라는 제목 하에 ‘선언서(Manifesto)’의 전문을 싣고 있다.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한국어 신문 ≪국민보≫ 1919년 3월 29일 자에는 “이는 합중국 비밀 정탐원이 동양으로부터 와 애드버타이저 3월 28일호에 게재한 것”이라고 하였다. 맥클래치가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3월 28일 오후 4시 45분 ≪국민보≫ 기자 승룡환이 그를 찾아가서 35분 가량 인터뷰를 하였다.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에 실린 「3·1독립선언서」를 누가, 언제, 어디서 영어로 번역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기에 실린 영문 독립선언서는 앞에서 본 최창식·현순이 가져온 「3·1독립선언서」와는 달리 서울에서 발행된 인쇄본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외에 알려진 최초의 완전한 영문 독립선언서라고 할 수 있다. 

AP통신사에서도 1919년 4월 3일 「3·1독립선언서」 영역본을 공식으로 미국 전역에 알렸다. ≪신한민보≫에는 1919년 4월 5일 자에 영문으로 된 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게재하였고, 4월 8일 자에 영문 독립선언서를 게재하였다. 

 

여러 종류의 영역본 「3·1독립선언서」

  

최초로 영역된 「3·1독립선언서」는 현순과 이광수가 중국 상해에서 번역한 것이지만, 이것은 아직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되기 이전의 것을 번역한 것이므로 완전한 형태의 「3·1독립선언서」 번역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완전한 형태의 영역본은 언제, 누가, 어디서 번역을 했을까? 영문 「3·1독립선언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번역되었고, 또 어느 언론이나 책자에 게재되었는가는 3·1운동이 국제사회에 얼마나 전파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필자는 현재까지 다섯 종류의 영역본을 발굴하였다. 현순과 이광수가 번역한 영역본의 원문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그 일부 내용이 중국에서 발행되었던 영문신문 ≪더 차이나 프레스 The China Press(大陸報)≫에 게재되었다. 


필자가 지금까지 발굴한 첫 번째 영역본은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에 게재되어 미주 언론에 소개된 것이다. 이 신문에 독립선언서의 전문이 실렸고, AP통신사에서 그대로 받아서, 미국의 각 언론에 게재되었다. 이 신문에서는 「3·1독립선언서」를 영어로 ‘Manifesto’라고 명명하였다. 「3·1독립선언서」의 제목이 아무런 명칭이 없이 ‘선언서’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영어로도 ‘Manifesto’라고 번역한 것 같다. 이 영역본은 “We herewith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Korean people”로 시작된다. ‘공약3장’을 ‘Three Items of Agreement’라고 번역하고 있다. 

두 번째 영역본은 3·1운동 당시 평북 선천에서 활동하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영역한 것이다. 이들이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독립선언서는 “We now proclaim to all nations of world,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people”로 시작된다. 이 영역본은 아마도 한국어와 한문에 능통한 선교사가 번역을 하였지만, 영어를 잘 아는 한국인이 도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 번째는 평양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작성하여 미국 장로교 본부에 보낸 「3·1운동 발발 보고서(Korean Independence Outbreak March 1st, 1919)」라는 문건에 수록된 영역본이다. 이 독립선언서는 ‘A Proclamation’이라는 제목으로, “We, proclaim, herewith, Korea an independent state and her people free”로 시작된다. 이 영역본 또한 평양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가운데 한국어와 한문에 능통한 선교사가 번역을 하였고, 한국인의 조력이 있었다고 보아야만 한다. 

네 번째는 앞의 두 번째와 같이,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보고문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영역본은 ‘Manifesto’라는 제목으로, “We hereby declar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freedom of the Korean people”로 시작된다. ‘공약3장’을 ‘Three Provisions of our Covenant’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영역본도 미국 북장로교 계열의 선교사가 보낸 것이지만, 어디에서 누가 번역하여 보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 선언서의 앞면에 ‘1919년 4월 10일’ 접수되었다는 도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 3월 초중순경에 한국에서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다섯 번째는 영어로 「3·1독립선언서」의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앞의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접수된 또 다른 보고문건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영역본은 ‘The Independence Declaration’이라는 제목으로, 한문 투로 작성된 독립선언서 내용을 영문으로 직역하여 표현하고 있다. “We hereby solemnly declare that Korea is an independent nation and Koreans are free people”으로 시작하고, ‘공약3장’을 ‘Three Terms to be Observed’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영역본은 누가 어디서 번역을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한국어 원문에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번역문 마지막에 굳이 “한국어 원문을 번역하였다”라고 부기까지 하고 있다. 

필자는 위에 언급된 다섯 종류의 영역본을 발굴하였지만, 그 외에 영문으로 된 독립선언서가 여러 종류 있을 것이다.

 
변영로 형제가 영역한 「3·1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의 영역본 가운데 현순과 이광수가 번역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번역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앞에 소개한 다섯 종류의 영역본을 모두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선교사들이 번역을 하였을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어려운 한문 용어로 작성되어 외국인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1독립선언서」를 읽어 본 한 선교사는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 “이 문서는 놀랄 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자로 된 원문은 문장과 문체에서 정치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많은 사상(思想)의 그림자는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3·1독립선언서」가 한문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한 외국인 선교사가 있었다. 평양에서 활동하는 찰스 프란시스 번하이슬(Charles Francis Bernheisel, 편하설, 片夏薛)과 트윙(Twing) 두 사람이다. 번하이슬 선교사는 1900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산정현교회 초대 목사, 숭실대학 교수 등으로 주로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2일 자로 선천선교부 헨리 윌러드 램프(Henry Willard Lampe) 선교사가 미국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번하이슬 씨와 트윙 씨가 독립선언서를 번역하면서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번역한 독립선언서는 앞에 소개한 다섯 종류의 영역본 가운데 두 번째의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무튼, 외국인 선교사가 「3·1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 경신학교 교장 에드윈 웨이드 쿤스(Edwin Wade Koons, 군예빈, 君芮彬)는 그가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본부 브라운(Dr. Brown) 총무에게 보낸 「영어본 독립선언서」는 한국인이 번역한 것이라고 하였다. 쿤스는 해당 번역본에 대해 “이것은 3월 1일 발행된 한국 「독립선언서」의 번역이다. 이 번역은 한국인에 의한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아주 정확하지만 물론 이런 문건의 번역은 비평의 대상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경신학교 교장인 쿤스 자신도 한국어에 능숙하지만, 한문이 많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독립선언서를 한국인이 번역하였다고 한다. 필자의 추측이지만 아마도 재한 선교사들이 미국에 있는 선교본부에 보낸 다른 영역본들도 한국인이 초벌 번역을 하고, 이를 영어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원어민이 교정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3·1운동 당시 「3·1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한 한국인이 있었다. 번역자는 우리에게 유명한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수주(樹州) 변영로와 그의 형인 변영태이다. 변영로는 해방 이후의 일이지만, 3·1운동 당시에 자신이 「3·1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했다고 한 바 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들어갈 무렵인 1953년 2월 24일 피난지 부산에서, 변영로를 비롯하여 공초 오상순, 횡보 염상섭, 월탄 박종화 등 유명 문인들이 ‘40년 문단 회고 좌담회’를 열었다. 이때 변영로는 “우리의 「3·1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것은 나와 지금 유엔총회에 가 있는 우리 일석(逸石) 형님과 둘이서 했습니다. 청년회관에서 밤늦도록 타이프라이터를 찍는데, 그 타이프 소리가 어찌나 요란스럽게 들리던지 밖에는 기마순사(騎馬巡査)들이 오고 가는데 참 땀을 함빡 흘린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것이 외국인 또는 외국기관을 통해서 해외로 나갔는데”라고 말했다. 

변영로가 말한 바와 같이 3·1운동 당시 서울 종로 YMCA회관에는 일제의 경찰이 철통같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YMCA 총무였던 윤치호의 1919년 3월 9일자 『영문일기』에 의하면, “(YMCA 회관) 수위는 회관에는 아무도 없으며, 경찰·헌병·형사들이 종로를 물샐 틈 없이 지키면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영로는 그의 형 변영태와 함께 YMCA에서 「3·1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영문 타이프로 타자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역한 독립선언서를 외국인과 외국기관을 통해 해외로 전달하였다고 했다. 변영로 형제는 한문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53년 2월 문인들의 ‘좌담회’에서 당당하게 자신과 변영태가 「3·1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였다고 자랑을 하였다. 이에 대해 박종화는 “그건 수주의 숨은 자랑의 하나이지”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로 보아, 당시 문학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변영로가 「3·1독립선언서」를 영역하였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3·1운동 기간에 변영로가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변영로 형제가 영역한 독립선언서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수주는 분명히 “외국인 또는 외국기관을 통해서 해외”로 보냈다고 했다. 1919년 당시 국내에 많은 서양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변영로의 말을 따른다면 선언서가 해외에 전달된 창구는 개신교 선교사와 선교기관 외에 찾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어떤 선교사와 선교기관에 전달되었겠는가. 경신학교 교장 쿤스가 보낸 영역 「3·1독립선언서」를 한국인이 번역했다고 했는데, 그가 미국에 전달한 것과 변영로 형제가 영역한 독립선언서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또한 앞에서 소개한 다섯 종의 영역본 가운데 마지막 번역본은 외국인이 번역하였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문투의 본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해당 영역본은 최남선이 쓴 「3·1독립선언서」의 본의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영어로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의 세밀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변영태·변영로 형제가 영역한 독립선언서가 쿤스 선교사에 의해 미국에 전달된 것이 아닐까.

 
영역된 「3·1독립선언서」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3·1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대외 선포한 문서이다. 한국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문서는 「3·1독립선언서」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언서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독립선언서가 국외로 전달되어, 영어 등 각국어로 번역되어 언론에 게재되었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서는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배로부터 한국민이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독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3·1독립선언서」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국외에 반출되어 국제사회에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국외로 반출된 최초의 필사본 「3·1독립선언서」가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중국신문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중국어 번역본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다. 국내에서 인쇄된 「3·1독립선언서」는 한국내 각국 외교기관과 외국인 선교사 등이 영어로 번역하여 국외로 전달하였다. 특히, 영역된 「3·1독립선언서」는 AP통신을 통해 미주의 각 신문에 실리게 되었고, 팸플릿 등으로 인쇄되어 보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책자에는 꼭 「3·1독립선언서」 전문이 그대로 실려, 국제사회에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표방하고 확산시키는 데 크게 일조를 하였던 것이다. 

「3·1독립선언서」는 정의와 인도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독립 선언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된 선언서를 읽는 세계인들이 한국 민족이 반드시 독립이 되어야만 한다는 데에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대내적으로 3·1운동의 대의를 표방하고 대중화에 기여하였다고 한다면, 영역된 선언서는 대외적으로 한국민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데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