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낙화落花

영국의 시 축제들

시인은 청진기, 아픔을 듣고 붉은 꽃을 처방한다

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이야기꾼의 운명, 이야기의 힘

SNS는 눈, 유튜브 문학은?

“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자동차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모든 순간들이 한국문학이고 ≪현대문학≫이다

하필이면

김점순 어머니

가면 오리, 오면 십리

티브이를 보다가,뼈 펴는 소리 포스터

행자가 사라졌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불꽃놀이

「동시대 문학의 시간착오와 불안」에 부쳐

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밀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LOVE NEVER FAILS

“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역사가 인류에 대해 말해주는 것

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통째로 얼지 않으려고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터키인들도 ‘타는 목마름’을 아는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9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단편소설

행자가 사라졌다!

이장욱 ㅣ 소설가, 1968년생
소설 『고백의 제왕』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천국보다 낯선』 등

경험이란 무엇일까? 입는 것일까? 먹는 것일까? 바삭바삭한가? 물렁물렁한가? 경험이 모여 추억이라는 게 되는 것일까?
행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경험 말이다.
추억도 역시.
그것이 좋다.

경험이 없다고 해서 세상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경험 많은 인간들이 외려 세상을 오해하기도 한단다. 그이들은 대개 경험이 만든 틀에 갇혀 살아가니까. 육이오를 경험한 사람은 육이오에, 유신을 경험한 사람은 유신에,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가난에 갇혀 살아가는 법이다. 평생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면? 다들 지들처럼 사는 줄 알겠지.
경험 많은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니 아마도 맞을 것이다. 경험이 많을수록 틀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생각은 편협하고 믿음은 완고해진다. 이런 걸 보면 경험을 지혜의 원천이라고 하는 건 우스꽝스럽다. 차라리 경험 없는 지혜가 더 현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험 없는 지혜라고? 그렇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 바로 우리 집 행자다.
행자가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하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다. 애완용 뱀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행자는 몸을 공처럼 잘 말아서 볼파이톤 또는 공비단뱀이라고 불리는 종이다. 길이 1미터 정도의 소형이지만 파충류는 파충류이므로 냉동 쥐 같은 것을 먹고 산다. 가공 사료는 먹지 않는다. 순하고 저 혼자 스트레스를 잘 받는 체질에다 어둡고 답답한 소형 리빙 박스가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파충류답게 생존력이 강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두어 달은 버틸 수 있다. 내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바짝 치켜든 행자는, 한마디로 말해서, 멋지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릴 때는 더더욱.
행자에게는 경험이 거의 없다. 살아 있는데 경험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거의’ 없다고 한 것이다. 행자는 성체가 되기도 전에 여기 이태리아파트 2동 301호에 들어와서 평생을 보냈다. 그것도 좁은 플라스틱 리빙 박스 안에서 말이다. 간혹 내가 물을 갈아주거나 박스에서 꺼내 핸들링을 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행자에게는 톱밥 깔린 리빙 박스와 집 안이 전 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행자는 엄연히 살아 있는 동물이며, 본능과 직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영물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행자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으면, 이 영물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구나 하는 느낌까지 든다. 나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남동생 규의 기분이나 감정 상태 등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이 틀림없다.
가령 행자의 움직임을 보면 그날의 집안 분위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분위기가 좋을 때 행자는 내 손바닥 위에서 상체를 곧게 펴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혀를 날름거린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춤추는 뱀처럼 말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몸을 둥글게 말고 대가리를 제 몸에 파묻은 채 시선도 주지 않는다.
파충류가 집안 분위기나 주인의 기분을 알아챈다고 하면 다들 코웃음을 치겠지만, 행자를 키워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작고 섬세한 얼굴, 아라비아 숫자 3을 눕혀 놓은 귀여운 입, 그 입에서 쉭쉭 나왔다 들어가는 두 갈래 혀,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추처럼 까맣게 빛나는 눈. 아무런 감정도 깊이도 없이 반들반들 빛나는 그 눈.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확실히 뭔가 읽히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행자는 떠들지도 않고 자기주장을 하지도 않으며 어둠과 침묵에 익숙하다. 냉혈동물답게 고독이니 우울이니 하는 것을 느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행자는 우아한 자세로 은신하며 세상을 꿰뚫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자가 사라진 것은 지난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은 아빠였지만, 아빠가 행자의 부재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아빠는 평소처럼 새벽녘에 일어나 휴일 아침의 테니스를 즐기고 돌아왔을 뿐이다. 전날 밤에 한잔 한 탓에 느지막이 일어난 엄마도, 학원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던 규도 행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행자의 실종을 알아차린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뒤부터는 매사에 별 반응이 없어서 점점 식물이나 사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케이블 티브이에서 매일 재방송으로 틀어주는 전원일기를 볼 때만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시선은 허공에 둔 채였고, 아주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근데…… 행자는 어디 갔네?
무슨 말씀인가 싶어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엄마는 뭔가 깨달은 듯 거실 장식장에 올려둔 리빙 박스를 열어보았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스 뚜껑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사건은 터진 뒤였다.
행자가 사라졌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엄마와 규가 집 안 곳곳을 뒤졌지만 행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파 밑에서 냉장고와 텔레비전 뒤, 그리고 하수구와 변기 안까지, 집 안의 모든 외진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곧바로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막 새로 읽기 시작한 추리소설을 던져놓고 집으로 달려왔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날 나는 집에 없었다. 어수선한 집에서 방학을 보내느니 한적한 기숙사에 머무는 쪽이 체질에 맞았다. 방학 계획이 있는 학생들을 위해 일부 방을 개방한 것이지만, 내게는 특별히 액티브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도서관에서 알바를 하고 내키는 대로 책을 읽다가 어둠이 깔린 황량한 캠퍼스를 걸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것이 좋았다. 신입생으로서 가질 법한 대학에 대한 기대치가 처음부터 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도 나는 추리소설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행자의 실종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뿐이다.
리빙 박스는 엄마가 손대기 전에 이미 열려 있었다고 했다. 행자가 스스로 열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박스를 열었는가? 대체 누가, 왜, 행자를 밖으로 나가게 했는가? 행자는 지금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는가?
나는 단서를 찾아 나섰다. 가족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추궁하다시피 알리바이를 캐물었다. 행자는 돌연변이라 독이 있다,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내가 약간 흥분했는지도 모른다. 누나 대체 왜 이래? 규가 짜증을 내며 진술을 거부한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행자는 내 인생 최초의 반려동물이었으며, 내가 직접 번 돈으로 들인 녀석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영물이었으니까.
모두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필사적이고 집요했다. 우리 집에서 행자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나뿐이었기 때문에. 행자의 행방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나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범인은 분명 가족 중에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누구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까?
아빠다.
내가 아직 이 인간을 아빠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소위 386 세대로 대학을 졸업한 후 긴 방황기를 거쳐 재무설계사가 되었다가 펀드 매니저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성공’이니 ‘입지전적’이니 하는 건 사실 아빠가 스스로를 방어할 때 사용하는 레토릭일 뿐이다. 외환위기 이후의 폭락장을 역이용해 업계에 진입했다가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 폭탄을 맞고 가산을 탕진한 처지에 입지전이라니, 꽤나 민망한 표현이었다. 지금도 빚이 남아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는 엄마의 수입을 보태야 근근이 유지될 정도였다.
아빠는 자신이 중도라고 주장하지만 엄마는 대놓고 ‘꼴보수’라고 불렀다. 아빠는 조간신문을 애독하며 거기서 얻은 정보로 세상을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신문 기사에 나온 수치를 외우고 그 수치로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비정규직이 어떻고 하면 곧바로 한국의 고용유연성 수치가 OECD 34개국 중 몇 위인 줄 아느냐, 빈부격차가 어떻고 하면 한국의 GDP 수치가 1972년에서 2018년 현재까지 몇 배나 뛴 줄 아느냐, 라고 대꾸하는 식이다.
물론 아빠 자신은 ‘꼴보수’가 아니라 문화인이자 교양인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바그너를 사랑하며 백남준이나 김환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특히 보기 드문 오페라 마니아로 DVD와 블루레이로만 백여 장을 소장하고 있으며 「라 트라비아타」에서 「마담 버터플라이」까지 오페라의 내용과 공연사를 줄줄 꿰는 사람이었으니까.
내연관계의 여자가 1년마다 바뀌는 오페라 마니아를 상상해본 일이 있는가? 나는 있다. 아니, 자주 본다. 게다가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가 오페라 마니아이기 ‘때문에’ 내연관계의 여자가 바뀐다는 것을 말이다. 진짜 오페라 마니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아빠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빠는 그날도 테니스를 치러 갔다가 돌아왔다. 우리 아파트 단지 뒤편에도 공용 테니스코트 한 면이 있지만 아빠는 그곳을 이용하지 않는다.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사설 클럽으로 차를 몰고 간다. 알고 지내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거기 모여 주말마다 테니스를 친다는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게 이런저런 이유로 업계에서 밀려난 중년 남자들이 정보를 교류하는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침에 운동복을 입고 거실에 나와 아몬드 우유를 마실 때만 해도 아빠의 기분은 가벼웠다.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집 안은 고요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도 쾌청해 보였다. 초여름 더위도 한풀 꺾인 데다 그날 아침에는 미세먼지 예보도 ‘보통’ 수준이었다. 모든 면에서 평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아빠의 일진이 마냥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여느 휴일처럼 차를 몰고 나가서 네 게임이나 뛰고 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관심을 두던 스타트업의 동향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게임에서는 단식 복식을 가리지 않고 연전연패였다. 이상할 정도로 안 맞네. 아빠는 중얼거렸다. 아빠는 승부욕이 강했지만 승부욕을 감추고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축하할 정도의 사교성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테니스 자체가 목적도 아니었으므로 아빠는 비교적 여유 있게 그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내가 질문을 퍼부었을 때 아빠는 오늘 일진이 매우 안 좋다고 대꾸했다. 그걸 내가 알 게 뭐냐. 나한테는 주의 의무 같은 게 없다. 아빠는 그렇게 덧붙였다. 지금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니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아빠를 가만히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추궁을 할 수는 없었다.
행자에 대한 아빠의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빠는 파충류 따위가 주인을 알아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며, 더더구나 사람을 가려서 리액션을 한다는 말도 금시초문이었다. 뱀은 괴물도 아니고 영물도 아니며 단지 뇌 용량이 작은 짐승일 뿐이다. 아빠는 그렇게 단정했다.
하지만 행자를 보고서는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아빠가 자기 손이나 팔에 행자를 올려놓으면 행자는 신기하게도 몸의 색깔이 변하고 화가 난 듯 혀를 날름거렸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였다. 나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 손에서는 결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손 위에서 행자는 적의를 드러낼 줄 아는 파충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변을 당한 적도 있다. 행자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아빠의 목덜미를 물어버린 것이다. 출혈은 없었고 약간의 상처가 났을 뿐이지만, 아빠 입장에서는 진심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애완용 뱀에게는 분명 독이 없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빠의 목덜미는 며칠 동안 붉게 부어올라 가라앉지 않았다. 아빠가 행자에게 악감정을 가질 만한 동기는 충분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날 아침, 갑작스러운 적의가 아빠를 휘어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실 장식장에 있는 행자의 박스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박스 구석에 몸을 말고 있는 행자의 모가지를 잡아 비닐에 넣은 뒤 차 트렁크에 실어 야산이나 하수구 같은 곳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비닐이고 야산이고 하는 게 번거로웠기 때문에 화장실 변기에 던져 넣은 뒤 물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빠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사태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면 그건 뭔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아빠가 범인이라면 그건 너무 단순한 추론이고,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다면 아빠가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아빠는 욱하는 감정에 일을 저지르는 유형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을 짜서 완전범죄를 모의한다면 모를까, 감정이 치민다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유형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인간을 경멸하는 편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박스를 그렇게 허술하게 열어놓고 외출했을 리가 없다.

엄마는 어떤가?
엄마는 내가 없을 때 행자에게 피딩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내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행자에게 냉동 래트를 넣어주는 것도 엄마였고 물을 갈아주는 것도 엄마였다. 그러니 엄마가 행자에게 못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적어보지만, 이런 확신의 순간이야말로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엄마 역시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없는 동안 물이나 먹이를 제공하는 일이 엄마 담당이라는 바로 그 점이, 가장 중요한 동기일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엄마는 뱀을 키운다는 것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저 징그러운 걸 꼭 키워야겠어? 뱀은 뱀이니까 독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저게 예쁘게 보인다니 그게 말이 돼? 엄마, 그건 그냥 편견이야, 뱀만큼 아름다운 생물은 없다니까.
처음에는 엄마와 이런 대화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내 얘기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엄마는 애초에 반려동물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고 집안 분위기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집안 분위기……라면 물론 나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었다.
사실 엄마 아빠는 서로 갈라서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한 상태였다. 아빠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엄마를 얕잡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에게도 따로 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운다기보다는, 서로가 상대의 애정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고 쿨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게 사실에 부합하기도 하고.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별거 상태였다. 같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각방을 쓰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거의 남남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사는데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 없이도 가족이 가능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이런 것이 새로운 가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 엄마는 불면증과 함께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빠 때문에? 천만에. 아니라니까. 엄마는 아빠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버지니아 울프로 학위를 받은 영문과 강사이며, 무명이긴 하지만 무려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로 최근에는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수자 이슈를 비롯한 각종 사회 현안에서 진보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좌파에 팔로어가 1,000명쯤 되는 트위터리안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제 겨우 마흔네 살이었다.
그렇다. 엄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버린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자와 말이다. 엄마는 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논문을 거의 쓰지 못했으며, 등단 후 10년이 지나도록 작품집 한 권 없는 무명이었다. 새로 시작한 장편소설은 엄마의 멱살을 잡고 침울과 우울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사실 엄마는 마흔넷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젊고 샤프해 보인다. 예전에는 가끔 홍대 클럽에 진출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곳을 다녀온 날에는 기분이 조금 좋아 보이곤 했다. 물론 그것도 30대 때 얘기고 요즘에는 혼자 방에서 글을 쓰고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다. 수면제의 도움이 없으면 잠에 들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그날도 엄마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길을 걷다가 묻지 마 살인을 저질렀다. 피살자는 낯이 익은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꿈속의 엄마는 자신이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시체를 업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저 아래로 던져버렸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정말 자신이 뭔가 저질러버린 것인가 헷갈릴 정도로 생생한 느낌이었다.
찜찜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있지만, 우울증 약에 취한 채로 술을 마시면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거리를 헤맬 수도 있고, 정리해놓은 책들을 이유 없이 바꿔 끼울 수도 있고, 가스를 켜놓은 채 라이터를 손에 들 수도 있다. 엄마가 약이나 술에 취한 채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적어도 나는, 그럴 수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엄마는 죽음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했던 철학자가 누구였던가. 그게 상투적인 얘기라고 생각된다면, 자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의 내면을 상상해보면 된다.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보면…… 죽음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지?
아, 행자다. 행자가 사라졌다면, 그건 아마도 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규,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내 남동생 말이다. 남동생이라고는 했지만, 규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 남매로서의 우애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중딩 동생이 있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그냥 생활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을. 녀석은 이제 나를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호기심이나 만용 때문에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아무래도 미성년자들이다. 고층 아파트나 옥상 같은 데서 물건을 던지거나, 인터넷 댓글에 막무가내 식의 욕설을 올리는 건 열에 아홉은 초딩들이 아닌가. 그들은 자기가 치명적인 짓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한다. 물론 규는 초딩이 아니라 중딩이긴 했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규야말로 유력한 용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미루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규 때문이다. 규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두 사람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자식의 미래 때문에 이혼을 미룰 만큼 엄마 아빠가 규에게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이 엄마 아빠는 둘 다 자기 삶이 있고 자기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빠에게는 S&P500, 항생, 니케이 지수 외에도 내연의 연인과 오페라와 테니스가 있었다. 엄마에게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었고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하는 연하의 연인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이 있었다. 게다가 아빠와 엄마는 과도한 자식 사랑이 자식을 망친다고 믿는 신세대 학부모였다.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도록 해야 한다는 데는 기본적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특히 엄마는 모성애라는 관념에 합리적인 적대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규에게 마음이 쏠릴수록 그런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규의 인생은 규의 인생이다. 대학 때까지는 케어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인생 아닌가.
뭐, 당연한 얘기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올인하는 건 이미 구시대적이다. 부모가 있다고 해서 스물이 넘어서까지 의지하는 건 철없는 캥거루 같은 짓이며, 자식이 부모의 삶을 독립적인 삶으로 인정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엄마는 9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소위 ‘X세대’였고, 아빠 역시 스스로를 ‘문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손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나 역시 학비 일부를 지원받는 걸 제외하면 이미 나 자신이 스스로를 감당하고 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알바를 두 개나 시작했고, 지금도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으며, 조만간 교외장학금에도 도전해볼 예정이니까. 나에게 낭만적인 대학 생활 같은 것은 뒷전이었다.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것이다. 대체 왜 규 때문에 이혼을 미룬다는 말인가. 그냥 이혼을 해버리고 경제적 환경만 제공해도 좋지 않은가. 바로 그 점에 불만을 가진 것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규 자신이었다.
이혼할 거면 그냥 이혼해도 좋아요.
어느 날 아침 식탁에서 규는 그렇게 말했다. 덤덤한 어조였다. 아빠 엄마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 금방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엄마가, 얘가 쬐그만 게 별소리를 다 하네……라고 대꾸했지만,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식탁에는 숟가락 소리만 울렸다. 침묵을 깬 것은 규였다.
뭐 그럼 알아서들 하시든가.
규는 그런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 아빠는 다시 한 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지만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속된 말로 둘 다 벙찐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좀 필요하다. 사실 엄마 아빠는 규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규의 인생은 규의 인생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대학 때까지 케어는 하겠지만 그 이후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고 아빠 엄마는 말했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스스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뜻에서.
첫째, 공부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부모의 레이더망을 벗어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평균 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컴퓨터 앞에 죽치고 사는 규에게 각종 주소, 아이디, 비밀번호 도용 및 문서 위조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아빠 엄마는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급 상승에 목매고 교육열에 불타는 구시대 학부모들이 아니었다.
둘째, 규는 이제 중딩답게 사춘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운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야동을 본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다. 사실 술 정도는 내가 가르쳐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규의 표현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이미 한 물 간 취미들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구리다’는 것이다.
사춘기 소년으로서 규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우선 아빠 엄마에 대한 적의가 강했다. 규에게 아빠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였고, 엄마는 자기 믿음에 취한 설교자였다. 의외였던 것은, 위선자보다 설교자에 대한 반감이 더 컸다는 점이다. 규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위선자는 선량한 척할 뿐이지만 설교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난체하는 새끼들은 다 죽어.
그건 규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규가 소위 ‘극우’ 사이트에 들어가 활동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트가 ‘극우’라는 것은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엄마의 표현이었고, 규는 거기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물론 엄마는 자기 아들이 바로 그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규가 오프라인에서 언제나 침묵만 지켰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식사 중에 규는 엄마 아빠 앞에서 조용히 자기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엄마 아빠가 정치적인 문제로 가벼운 논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이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신자유주의가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하는 얘기가 아빠 엄마 사이를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했다. 어느 순간에 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밥알을 씹으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전한다는 투였다.
그런 게 어딨어.
두 사람은 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규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숟가락으로 밥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을 뿐이다.
지금 레드콤플렉스니 뭐니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건 없다구. 진짜 우파는 이제 시작이야. 우린 엄마 아빠 때와는 프레임이 다르다구.
규의 말을 들은 엄마와 아빠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입은 크게 벌어진 뒤에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제 겨우 중3인 열여섯 살짜리의 입에서 나올 단어들이 아니었다. 얘가 레드콤플렉스가 뭔지 알고 하는 말인가? 프레임? 프레임이라고? 요즘 중학교에서는 그런 단어도 가르치나? 우파니 좌파니 하는 걸 얘가 알고 있다는 말이야? 신문 사설을 외웠나? 정치하다가 죽은 무슨 귀신에 빙의라도 된 건가?
두 사람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인형이 말을 한다든가, 마네킹이 걷기 시작한다든가, 댕댕이가 악수를 청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반응이라고 할까. 댕댕이건 마네킹이건 인형이건, 어쨌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던 사춘기 남자애는 ‘정확하게’ 그렇게 말했다. 헛것이나 환상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로서.
엄마는 곧바로 규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컴퓨터를 뒤지고 SNS 계정을 스캔했으며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규의 학교생활에 대해 문의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규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우회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규의 루틴에 대해서, 규의 관심사에 대해서, 규의 온라인 생활에 대해서 등등. 스트레이트하게 물어본 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떠본 것뿐이지만.
모은 정보를 합쳐보니 결과는 이랬다. 규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파워유저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돌 연예인과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가 프리메라리가와 이종격투기 커뮤니티로 옮겨갔다.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이름을 빠삭하게 부르게 된 뒤에는 케인 벨라스케즈니 마크 헌트니 하는 격투기 선수들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상화폐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다가 3학년에 올라와서는 모 웹사이트의 하위 카테고리에 있는 정치사상 커뮤니티로 옮겨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사상…… 커뮤니티라니, 그게 뭐니?
엄마는 규의 친구 두엇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수화기 저편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았다.
몰라요. 우리가 알 게 뭐예요. 아줌마, 블리자드 디아블로 투 알아요? 모르죠? 거봐요. 그런 거예요.
엄마는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3이 정치사상 커뮤니티라니, 무슨 게임 커뮤니티라든가 프라모델 또는 밀리터리 커뮤니티라면 몰라도 정치사상…… 커뮤니티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팩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리저리 찔러본 바에 의하면, 규가 처음부터 정치사상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들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용어도 어려웠고 문장도 난해했으며 열띤 분위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규는 여기에 뭔가 있다는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규는 반복적으로 게시물들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 안에 글 내용을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프레임’은 처음에는 삼각형이나 사각형처럼 단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엉성하나마 그물 모양을 갖추어갔다. 규는 성글고 엉성한 개념의 그물을 던지면서 게시물들을 읽어 갔으며, 개념들을 차근차근 검색하고 댓글의 반응들을 참고해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게시물 댓글난에 라거나 처럼 간단한 이모티콘을 남겼다. 느낌표, 물음표를 연달아 찍기도 했고, ㅠㅠ라든가 물개박수를 치는 이모티콘을 붙이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동조나 조롱 댓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프리메라리가와 이종격투기, 그리고 각종 RPG 게임에서 배운 용어들을 뒤섞어 썼다.
적과 아군을 구분한 뒤에는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입장’을 갖고 발언한다는 것의 쾌감도 알게 되었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규는 그 이전에 알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자 허구처럼 느껴졌다. 자기가 지지하는 주장이 과격하면 과격할수록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규는 세계의 진실을 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자신과 자신의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희미한 확신을 느끼기까지 했다.
몇몇 댓글이 호응을 얻자 규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민자, 난민, 여성, 소수자, 환경 같은 단어들만 나오면 곧바로 리액션을 취했다. 댓글을 달거나 게시물을 올렸다. 무플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다다익선이었다. 최근에 규는 동물보호단체 사이트에 대한 사이버 테러에 참여하고 있었다. 고양이 밥 주기, 유기견 안락사 반대 같은 테마들이 규의 심기를 건드렸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고양이와 유기견이 인간보다 더 고귀하고 존엄하다는 건가. 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시민단체 측에서 악성 댓글을 단 사람들을 고소한 뒤 게시판 분위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규는 적의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엇에 대한 적의? 글쎄, 그건 규 자신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규가 행자에게 아예 애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학년이 되면서 태도가 싹 달라졌지만,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규는 행자를 관찰하고 행자를 손에 올린 채 노는 걸 좋아했다. 특이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런 규가 설마……라고는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상투어구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우리가 ‘설마’라고 중얼거리는 순간은, 부정하고 싶은 예감이 이미 현실화된 후이다.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은 용의자가 또 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들다가도 인간은 알 수 없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규 얘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할머니다. 할머니는 이제 갓 여든이 넘었는데도 백 살은 된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어떨 때는 정말 할머니가 식물의 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다. 식물이라고 해도 장미나 제라늄 같은 종류가 아니라 선인장이나 고무나무 같은 종류의.
할머니는 조금씩 숨을 쉬고 조금씩 광합성을 한다. 물도 먹을 것도 최소한으로만 섭취한다. 할머니는 몸이 작고 가볍다. 집 안에서도 휠체어의 일부인 것처럼 앉아 있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대화도 많이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의사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텅 빈 눈으로 사람이나 창밖을 바라보지만 그 눈빛에는 영혼이라 할 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식물에게 정말 영혼이 없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할머니가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등 뒤의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면, 할머니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서 있을 때가 있다. 일어서서 선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에는 아주 느리지만 확고한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어서, 혼자 화장실에 가거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슬로비디오를 보는 느낌이지만, 때로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한 기분이 된다.
할머니는 혼자 시골에서 사시다가 요양원으로 옮긴 지가 벌써 2년째였다. 꽤 럭셔리한 요양원으로, 시골집을 처분한 돈에 엄마와 큰이모네가 얼마간을 보탠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 요양원에 트러블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잠시 집에 와 있게 된 것이다. 트러블? 요양원에 있던 노인 중 한 사람이 방화를 했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요양원 일부를 리모델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화를 한 노인은 자기를 요양원에 가둔 악마들을 응징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악마들은 이미 세상을 뜬 전직 대통령들이었다.
할머니가 반응을 보이는 대상은 딱 셋이다. 하나는 케이블 티브이에서 반복해서 내보내는 전원일기. 앞서도 얘기했지만, 전원일기의 무언가가 할머니의 뇌세포를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유년이나 청년 시절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용엄니가 나오면 무조건반사인 듯 뭔가 낮게 중얼거리시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할머니의 입에 귀를 대고 그 중얼거림을 들은 적도 있다. 할머니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혜자 최불암이가 연기를 참 잘하쟈.
평생을 시골에서 살아서 대도시의 상자 곽 같은 아파트에 적응하지 못한다……라는 건 선입견이고, 할머니는 오히려 아파트를 선호했다. 깔끔해서라는 게 엄마의 설명이었다. 할머니가 전원일기의 무언가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 좀 신기한 일이었다.
할머니가 반응을 보이는 대상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행자다. 행자와는 단지 눈을 맞추는 정도가 아니다. 할머니와 행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할머니와 행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뭔가 중얼거리고 행자는 슬슬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행자가 할머니의 중얼거림에 리듬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으로 알았다. 그 풍경은 ‘대화’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애초에 행자라는 이름도 실은 할머니가 붙여준 것이다. 행자는 사실 할머니 자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뱀한테 할머니 이름을 붙이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할머니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엄마가 설명을 덧붙였다. 할머니는 이름이 불리지 않은 지 오래되셔서 이름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게 심히 불쾌하고 화가 났지만, 사실 나조차도 할머니의 이름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행자는 자정에서 아침 열 시 사이에 사라졌다. 전날 자정에는 엄마가 물을 갈아주었다. 피딩은 아직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행자는 구석 자리에서 얌전히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다음 날 아침 열 시가 되어 할머니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이다. 아주 희미해서 그게 할머니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고 했다.
근데…… 행자는 어디 갔네?
엄마가 거실 장식장의 리빙 박스를 내렸을 때는 이미 사건이 일어난 뒤였다.
행자가 사라졌다!
그런데 어디로?
만일 집 바깥으로 나갔다면?
그래서 아파트 다른 집에 스며들어 간다면?
엄마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후 면밀히 조사한 결과, 박스에 바닥재로 쓴 톱밥 가루가 몇몇 곳에서 발견되었다. 톱밥 가루는 신발장 아래에도 있었고 창문 틈에도 끼어 있었다. 행자는 분명 살아 있으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집 바깥으로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서양 가옥처럼 ㄷ자 구조에 5층짜리 건물 3개 동으로 되어 있다. 저층에 소규모라서 단지 내 인구밀도가 낮다. 그건 우리 단지가 여느 아파트와 차별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대개 중산층 이상 고학력에 문화적이고 교양 넘치는 인간들이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아파트 안에서는 모든 걸 다 감싸 안을 듯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매매 가격을 낮춰 내놓는 집이 없도록 담합하고, 관리비 부담 때문에 경비인력을 감축하고, 옆 단지 놀이터 라인이 대지를 침범했다며 소송을 벌일 때는 대단히 호전적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곳에서 관리사무소나 입주민 대표자 회의의 허가를 받지 않은 동물이…… 그것도 파충류가…… 무려 뱀이…… 아파트 여기저기에 출몰한다면?
창으로 스며든 뱀이 자정의 식탁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화장실에도 스며들고 침실에도 스며든다면?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내민 채 그 검고 빛나는 눈으로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면?
냉혈동물답게 뱀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차갑고 미끈거린다. 깊은 밤에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그것은 인간의 꿈속까지 스며들지도 모른다. 뱀이라는 동물은 스르르, 스며들기가 특기이기 때문에.

혹시 당신이 아파트 길을 걷거나 집 안에서 대화를 하거나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이불을 걷었다가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게 우리 집에서 나간 바로 그 생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애완용은 독이 없으니까 괜찮아, 라고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칠지도 모른다. 변종이라는 게 있고 돌연변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지금 내 몸에 서서히 독이 오르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나는 이미 핸들링을 하다가 행자에게 물린 적이 있다. 실은 한두 번이 아니다.
나 역시 행자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것만은 이해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야, 사태의 전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반응을 보이는 대상으로 셋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나는 전원일기, 또 하나는 행자,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나.
할머니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 입술이 뭔가 발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입술의 움직임에 유의하면서 나는 가만히 할머니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전날 밤에 엄마와 아빠는 또 사소한 문제로 다투었다. 규나 할머니를 둘러싼 문제였을 것이다. 규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미친 듯이 악성 댓글을 달고 있었겠지.
그리고 깊은 밤, 할머니가 휠체어에서 스르르 일어난 것이다. 고요한 밤의 거실에 가만히 서 있다가, 할머니는 장식장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할머니의 입술이 ‘행자’라고 발음했을 때, 나는 그것이 박스 안의 행자를 말하는 것인지, 할머니 자신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어쨌든 행자는 또 다른 행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행자는 박스의 뚜껑을 느리지만 침착하게, 열었다. 박스 안에는 행자가 오래전부터 어둠 속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었다. 할머니는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행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라고. 음악도 없었고 보는 사람도 없었는데……라고. 김혜자와 최불암이 연기를 참 잘하는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