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대산대학문학상 해외문학기행 기행문
글쓴이 : 정수민 날짜 : 13.03.08|조회 : 8422

글 / 정수민_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제11회 대산대학문학상 동화 부문 수상자

유럽. 그곳은 버릇처럼 내뱉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단 걸 알기에 혀끝에서 더욱 달콤한 미지의 세계였다. 거길 실제로 가게 되다니. 이번 당선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학 4년 내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행 첫날, 나는 육중한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거의 10년 전부터 우리가족과 함께 했던 캐리어는 공항에서 한쪽 바퀴를 감싸고 있던 고무테가 빠지더니, 나중에는 다른 한쪽의 것마저도 빠져버렸다. 맨발로 걷는 듯 그 날것 그대로의 달달거림과 나는 닮아 있었다. 유럽이 옷깃 한 자락만 펄럭여도 ‘어머나!’하고 낭만에 젖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별 다른 도리 없이 장장 10일을 맨발로 굴러다녀야 할 내 캐리어의 바퀴처럼, 나는 머리가 띵 울릴 만큼 유럽이 생생한 아득함을 선물해주기를 바랐다. 10년 전, 내가 처음 해외여행을 시작했던 그때처럼.
하지만 이게 웬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10시간 넘는 비행은 나에게 온갖 오락거리를 제공해줌으로써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비록 단체여행이기는 해도 가족과 떨어진, 개인으로서는 처음 해보는 해외여행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당선자들과 별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었고,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고, 밥을 맛있게 먹었다. 게다가 창밖으로 내다본 독일의 첫 인상은 안개가 끼고 흰 눈이 가득 쌓인, 한 마디로 우울한 도시 풍경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호화로웠던 괴테 하우스가 아니었다면 프랑크푸르트는 내게 메마른 나무들만 잔뜩 널린 춥고 휑한 곳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이동하던 중, 창밖으로는 설원 풍경이 가득 펼쳐졌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던 크레이프를 한 입 베어 물고 밖을 내다보고를 반복하며, 저 넓은 땅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는 걸 누가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달리며, 나는 오래도록 한곳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그제야 독일이 비교적 편안하게 느껴졌다. 베를린에서 노선정 번역가 선생님, 다와다 요코 작가와 나긋하면서 진지한 대담을 가졌던 식당의 채광도 기억난다. 별 것 아닌 그 사소한 순간들이 괜히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가는 이지젯 안에서 ‘외국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 로망은 퍽 소박해져 있었다.
프랑스는 조금 달랐다. 파리에서의 관광은 훌륭했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4시간을 거의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아는 그림들을 구경했다. 지난 학기에 미술 교양을 들었기 때문인지, 계속 가다보면 낯익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길치인지라 프랑스 직원에게 영어로 물어가며 다른 층으로 향하거나 출구를 찾아 헤맸다. 비록 고되었지만 ‘이런 델 언제 또 오겠어!’ 그 생각 하나가 힘을 발휘해 이후에 이어진 오르셰 미술관 관람도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좋았던 건 유명한 그림 때문이 아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 흑인 직원과 웃으며 “봉주르.” 인사를 주고받았던 경험, 리옹3대학 한국어학과의 프랑스 학생들 앞에서 프랑스어로 자기소개를 할 때 발음 좋다고 칭찬을 들었던 경험을 한 뒤, 나는 본격적으로 유쾌해졌다. 그 자신감은 이튿날 1학년생 야미나, 이민숙 교수님까지 함께 리옹 시내를 둘러보면서도 이어졌다. 나는 어느 식당 화장실 앞에 줄을 서면서 뒤에 있던 중년 프랑스 여자에게 먼저 “봉주르.”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내가 화장실을 쓰고 나오자 “오 부아.”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몇 마디 안 되는 프랑스어 실전 대화는 나에게 다시금 외국여행의 맛을 실감케 했다. 그것은 왠지 모를 의무감에 불타 다녔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 미술관에서의 관람, 너무 크고 웅장해 카메라 한 컷에는 도저히 담기지 않았던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의 고요한 분위기, 밤 조명을 받아 마치 황금 같았던 에펠탑의 번쩍거림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거였다. 언어의 힘은 그렇게 강했다.
이렇듯 유럽여행에 서서히 익숙해질 무렵 만난 마지막 여행지, 영국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피날레를 장식해주었다. 시종일관 구름이 껴 있고 햇빛 보기가 어려울 줄 알았던 런던은 관광 첫날 놀라우리만치 청명했다. 간간히 비바람이 불긴 했지만 빅벤과 웨스트민스터사원을 구경하고, 버킹검 궁전 앞에서 군위병 교대식을 보기 전후로 나는 계속 기분이 상쾌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푸르디푸른 공원 잔디를 그저 눈으로만 안타깝게 좇으며, 그간 간직했던 영국의 낭만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언젠가 저 잔디를 꼭 밟아보는 거다.’ 초록에 대한 환상은 그날 저녁에 뮤지컬 <위키드> 관람을 마치고서 이튿날, 드디어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빈티지 가게와 저택들이 동화 속 풍경처럼 아기자기했던 노팅힐을 구경한 뒤, 나는 주어진 개인 시간을 활용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 그린 파크에 갔다. 통통한 다람쥐가 행여 내가 먹이를 줄까 가방에 달라붙기도 하고, 바다에만 있는 줄 알았던 갈매기가 여기저기서 ‘끼욕끼욕’ 울어대던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내게 시간이 몇 시냐고 물어왔다가 다정한 얼굴로 나의 출신 국가와 현재 여행 중인지를 물었다. 이것이 책에서만 보던 ‘외국인이 절로 말을 걸어와요’인가!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좀 더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낯선 현지인과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가 괜히 뿌듯했다. 그린 파크의 끝없는 초록 잔디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따라 조금 으스스해 보일 즈음, 나는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잔디 로망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마지막 날, 호선 언니와 함께 둘이서 신나게 어느 공원 언덕을 따라 올라갔는데, 열 발자국도 못가 “아차!”하고 후회했다. 비와 눈 때문인지 질퍽했던 진흙이 신발과 레깅스 바지 밑단에 튀었던 것. 그렇게 나의 로망은 어설프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 얼룩을 어떻게 좀 닦아볼까, 남몰래 전전긍긍했다.
생각해보니 유럽에 대한 그동안의 나의 로망이라고 해봤자, 카피 한 줄 분량에 불과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면 곧 허물어질. 그래서 10일간의 유럽문학기행에서 내가 기댔던 건 기차 안에서 옆자리 동료와의 대화 한 마디, 같이 들었던 음악, 숙소에서의 농담과 장난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길 가던 외국인의 관심 섞인 인사 하나가 그 나라의 기념비적 관광지보다 짜릿했던 것도 그래서였는지도. 세계가 빠르게 현대화되어서인지 여간해서는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던 이번 유럽여행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다음 해외여행을 기약하게 만드는 건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사소한 인간적인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 나라에 대한 로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소금처럼 적당히 내 혀를 달래주도록 해야지. 모쪼록 여행 내내 좋은 말벗이 되어준 당선자 언니오빠, 친구들과 순탄한 일정 진행을 위해 애써주신 장근명 담당자님, 김성진 담당자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번 유럽문학기행을 내게 허락해준 대산문화재단에도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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