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사랑의전당殿堂

세비야, 유쾌한 열정과 빈티지의 황홀

“외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예술”

파리-평양-서울을 달리는 평화열차를 꿈꾸며

한국인의 의식현상학, 시험판

이상 소설 「날개」 이어쓰기 ①사이렌이 울릴 때 ②마지막 페이지 ③1교시 국어영역 ④우리들은 마음대로 ⑤진술에 따르면 ⑥대합실에서

“역사를 알 때 예술의 추상주의를 알 수 있다”

총·균·새

모든 시들이 등단작이다

1977년 매일신춘문예 시상식

다 락

불교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

울음에 관하여

감동은 현실을 구원하는가

태양이 한 마리 곤충처럼 밝게 뒹구는 해질녘, 세상은 한 송이 꽃의 내부

①만찬 ①그럴 때가 있다 ②절 전화 ②고구마의 말

①북쪽 별을 찾아서 ②미래과거시제

첫 번째|마침표 유감 두 번째|아주 흔한 위로 세 번째|텍스트와 세계 네 번째|집을 떠나 집으로

①전후 국가재건 토목사업에 헌신한 ‘후반기’ 모더니스트 ②시대를 풍미한 『얄개전』을 쓴 딸바보 ③시와 후학과 커피를 사랑한 ‘동해안의 시인’

그리운 예술가(藝술架)

되돌릴 수 없는 7년, 되살리지 못한 7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사군자

치명적인 것들

다채로웠지만 2% 부족한……

탄뎀번역을 소환함

“말로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타는 목마름

대산창작기금,외국문학 번역지원

2018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등

기획특집

①사이렌이 울릴 때

- 박제가 된 천재를 위하여

글 이승우 ㅣ 소설가,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59년생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 『미궁에 대한 추측』 『신중한 사람』,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 『지상의 노래』 『생의 이면』 등

경성역 티룸에서 나와 한참을 걸었다. 나의 그녀는(이렇게 부르는 것을 이제 그녀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는 부끄러워했지만 이제는 언짢아할 것이다. 전에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처 럼 이제 언짢아하는 그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은 쉽고 또 어떤 면에서 달콤했지만, 언짢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 어떤 면에서도 달콤하 지 않다. 그녀가 ‘나의 그녀’라고 부르는 내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겨 야 할까? 그녀가 내 목소리가 미치는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작정을 했다는 것을? 아니, 그런 작 정을 한 것은 나인가? 다행한 불행이라는 말이 성립이나 되는가? 나는 자조와 탄식 말고는 할 수 없 는 사람이 되었다) 시계를 보고 플랫폼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가야 한다며 일어났다. 그 녀의 표정에는 어떤 아쉬움도 미안함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자세는 지나치게 꼿꼿해서 누군가 만 들어놓은, 아무 감정도 담길 줄 모르는 조형물처럼 보였다. 플랫폼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나의 제안을 그녀는 고개를 두 번 아주 살짝 옆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거절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녀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그 말에 도리 없이 설득 당했다. 그녀와 여 행을 떠나기로 한 남자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나와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만은 추측할 수 있다. 옷을 잘 입고 돈을 잘 쓰고 여자들이 혹할 만한 말을 능숙하게 할 줄 알고 진실은 장식품으로도 달고 다니지 않는, 느끼하고 미끈미끈한 남자.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을 좋아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나의 그녀가 그러는 것은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나 무라듯 말했다. 내 말은 그녀에게 투정으로 들렸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동경에서 몇 년씩 유 학씩이나 하고 온 남자가 고리타분하게 왜 이래요? 하고 힐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하기야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많이 흘렀 다. 동경에서 공부하는 긴 시간 동안 잠시도 그녀를 잊지 못했고 오직 돌아와서 그녀와 함께 살 희망으 로 버텼다는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라고 그녀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 포괄적인 한 문장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말도록 지시하고 있다는 걸 나는 눈치 챘고, 눈치 챈 이상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마음에 가시가 찔리는 것 같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예민한 사람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녀가 경성역 일 이등 대합실 한 곁에 위치한 티룸에서 일어나 플랫폼을 향해 꼿꼿하게 걸어가는 동 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 나는 그녀의 커피잔의 커피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는 것을 발견했지만, 내 커피잔 역시 그러하다는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빈자리를 찾는 손님들의 원망어린 눈빛과 여급의 재촉을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뎠다. 더 이상 자리 를 차지하고 버티기가 어려워졌을 때에야 티룸에서 나와 약간 어질어질한 상태로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정신이 좀처럼 가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살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극심한 자괴감에 빠져서 비틀 거리다가 과장된 감정의 포즈에 스스로 속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도 하며 걸었다. 어디를 얼마나 쏘다 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 역시 있었을 리 없다. 예컨대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간 것이 어떤 의지의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연에 개입하거나 우연을 조종하는 초월적 존 재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참고하려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자살할 마음을 가지고 그 옥 상에 갔다고 섣불리 단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 백화점 옥상에서 마주친 한 남자 (이 남자의 인상을 한두 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입고 있는 어두운 빛깔의 골덴 양복 은 소매가 해지고 깃이 말려 들어가 보기 흉했다. 그 안에 받쳐 입은 스웨터는 낡고 더러워 보였다. 직 장에 가거나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어서 외출한다면 절대로 입고 나오지 않을 복장이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깎지 않았고 세수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집에서 뒹굴다가 꾸미지 않고 그냥 나 온 것이 분명한 모양새였다. 삐쩍 마른, 근육이라고는 1그램도 없을 것 같은 빈약한 몸의 어디에도 기 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땅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호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 고 금붕어들이 뻐끔거리는 어항 주변을 흐느적거리는 폼이 내 눈에는 흡사 연체동물처럼 보였다. 뼈 도 근육도 없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 볼썽사나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초라하거나 궁 상맞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긴 했다. 단장하지 않은 외모와 걸치고 있는 거친 옷 밖으로 뚫고 나오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거나 연연할 이유가 없는 정신이 뿜어 내는 일종의 빛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먼저 눈에 띄기 마련인 외모의 볼품없음과 처지의 빈궁 함에 가려져 당연히 밖으로 잘 표현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나처럼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의 볼품 없는 외모와 빈궁한 처지가, 마치 달무리가 달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그의 정신의 날카로움을 더욱 돋 보이게 한다고 느끼지는 못할 터인데, 실제로 나처럼 예민한 사람이 흔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 에 보이는 비참 너머의 다른 그를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다)에 대해서도 자살할 마음 을 먹고 백화점 옥상에 올라왔다고 경솔하게 단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 옥상이 왜 그런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사람에게 자살할 마음이 있었다고도, 없었다고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것은 섣불리 단정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거니와 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