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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예술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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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트블뤼테(Angstblüte)와 말년의 양식(Late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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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파 란 ②문 앞에서

손등이 가렵다

첫번째|시인의 나무 세번째|술과 글 두번째|'문학'하는 요괴를 바라보며 네번째|문학이 죽으면 성실해지겠죠

①자신의 세계, 건강함 그리고 작가의식 ② 우리의 우리에게… 점과 점을, 잇는 선, 으로 이루어진, 육면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몇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세계. 그리고, 빛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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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근대 예술과 그 이후

글 김상환 ㅣ 철학자,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공자의 생활난』 등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 꽃으로부터
능금 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 김수영의 「먼 곳에서부터」(1961) 전문


근대 예술의 특징
  근대 예술의 특징은 ‘먼 것’,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에 있다. 이때 불가능하다는 것은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가령 근대 이후 음악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노력이다. 미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시와 같은 언어 예술은 말할 수 없는 것과 씨름한다. 시는 침묵의 웅변을 연출할 때 최고 수준에 이른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의 세계로 끌어들인다는 것이 근대 이후의 예술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런 특징을 표현하는 철학적 용어로 데리다의 ‘글쓰기(écriture)’ 혹은 ‘기입(inscription)’을 들 수 있다. 이 용어는 일차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영역(카오스, 광기)과 재현 가능한 영역(코스모스, 이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폭력의 교환을 가리킨다. 가령 원시적인 카오스(차이)는 코스모스(동일성)를 위협하는 힘이다. 따라서 코스모스의 입장에서 그것은 지속적으로 방어해야 할 폭력이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카오스의 힘을 자기 안으로 불러들일 때만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코스모스의 입장에서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질서에 부합하도록 왜곡시켜야 할 동화의 대상이다. 데리다의 ‘글쓰기’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창발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이런 경계상의 사건 속에서 카오스의 힘과 코스모스의 힘은 서로에 의해 훼손, 변형된다. 가령 언어 저편의 광기는 시적인 기입에 의해 언어 안으로 길들여지면서 본래의 야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내면화되는 광기는 어떤 변화를 낳는다. 언어는 그 광기에 의해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는가 하면, 그 힘을 제압하면서 드디어 새로운 속도나 구도 속에 다시 안정을 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떻게 제압하는가? 그것은 기존 언어로서는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겨우 가능한 일이다. 언어의 무의식에까지 이르고, 그래서 기존 잠재력의 한계에까지 도달하는 고투 속에서만 카오스의 폭력을 이겨내고 다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시는 그렇게 발견된 한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새로워진다.
  위에서 인용한 김수영의 「먼 곳에서부터」에서 ‘먼 곳’은 시적인 기입 속에 포착된 어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먼 곳에서부터 / 먼 곳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여기서 ‘먼 곳’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적 표현 저편의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표현 안에서 말하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이런 두 가지 침묵과 관계하는 시 쓰기의 고통 속에서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형태 속에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현대시의 본성을 주제로 한 메타시라 할 수 있다. 김수영은 여기서 언어 저편의 재현 불가능자와 언어 이편으로 기입된 불가능자 사이에 위치해야 하는 전위(前衛) 시인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예술과 근대성
  근대 이후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재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나뉘는 경계에 서 있다는 점에서 전위적이다. 예술적 근대성은 전위성으로 첨예화된다. 그런데 전위 예술을 가리켜 보통 ‘순수 예술’이라 한다. 예술을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합목적적인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술의 미래적 가능성 자체를 위한 자기 입법적 예술이라는 점에서 전위 예술은 순수 예술의 핵심이다. 그런데 예술이 순수화되고 전위화된다는 것은 근대 문화 일반, 혹은 근대성 일반 안에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순수 예술은 근대성을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이자 근대성을 미래로 열어놓는 첫 번째 요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유럽 문명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후 지구 전역으로 보편화된 이 근대성은 다섯 가지 요소를 기본 내용으로 한다. 첫째는 개인의 자율적 내면성에 대한 존중과 그에 기초한 윤리관이다. 둘째는 과학의 중시와 그에 바탕을 둔 자연관이다. 셋째는 민주주의적 입법체계의 수용과 그에 기초한 정치관이다. 넷째는 상업의 중시와 이와 맞물린 자본주의적 경제관이다. 우리는 여기에 마지막으로 예술과 기술의 분리, 혹은 순수 예술의 등장을 덧붙일 수 있다. 자율성의 윤리, 과학적 자연관, 민주주의 정치, 자본주의 경제, 순수 예술이라는 이상의 다섯 가지 요소가 언젠가부터 세계사의 일반적 흐름을 규정해온 보편적 근대성의 주요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이런 다섯 가지 요소는 각각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 자율성의 윤리와 관련해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 과학적 자연관과 관련해서는 17세기 과학혁명이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는 18세기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역사적 분수령으로 한다. 순수 예술의 등장과 일반화는 19세기의 문턱을 지나던 독일 낭만주의의 충격으로 돌아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순수 예술가는 보들레르가 파리의 거리를 활보하던 19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순수 예술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은 실러의 ‘미적 국가 이념’을 계승하는 독일 낭만주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순수 예술가의 등장은 한편으로는 근대적 직업관의 완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 자유 관념의 성숙에 해당한다. 직업을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실현 및 자발적 도야의 장소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국면이 무르익을 때 비로소 순수 예술가가 등장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율적 윤리관의 완성 국면으로, 따라서 근대적 인간관의 완성 국면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예술가처럼 자신의 창의적 역량으로 돌아가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 예술가처럼 자신의 고유한 우주를 구축해간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해 정립된 근대적 노동관의 배후에도 이런 예술 중심의 직업관이 자리한다. 근대 세계에서 노동은 예술적 작업에 버금가는 창조적 과정이며, 그래서 그것은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된다.

테크네와 포이에시스
  순수 예술, 특히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심미주의가 이론적으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테크네(techne)와 포이에시스(poiesis)의 분리다. 셸링의 용어로 하자면 테크네는 예술적 생산에 있어 의식적인 측면을, 포이에시스는 무의식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칸트는 이미 예술적 생산을 취미와 천재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했다. 이때 취미는 규칙화 가능한 측면을, 천재는 규칙화 불가능한 측면을 가리킨다. 규칙화할 수 없다는 것은 전달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무의식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적 의미의 예술가는 취미에 의해 훈육된 천재다. 취미에 의해 훈육된 한에서 예술가는 강제적 노동의 주체이자 기계성의 노예다. 반면 천재인 한에서 예술가는 순수 유희의 주체이자 새로운 이념의 창조자다. 그런데 취미와 천재 혹은 기계성과 유희가 서로 충돌할 때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 칸트는 의식적인 측면에, 다시 말해서 취미와 기계성 쪽에 손을 들어준다.

▲ 칸트의 『판단력비판』     

“취미는 사상내용 안에 명료함과 질서 정연함을 투입한다. 이로써 [미적] 이념들은 견고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찬동을 얻으며 다른 사람들이 계승하고 끊임없이 진보하는 문화의 힘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에 어떤 예술적 산물에서 이 두 가지 속성이 상충하여 어떤 것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천재 쪽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판단력비판』 50절

  칸트는 취미를 결여한 천재, 혹은 기계성과 분리된 순수 유희를 고삐 풀린 말에 비유했다. ‘테크네 없는 포이에시스’는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설득력도, 역사적 계승의 문맥 안에 안착할 중력도 없는, 그래서 해가 뜨자마자 사라져야 할 일시적 운무(雲霧)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글쓰기’란 말로 암시하고자 했던 것도 이 점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글’이란 일상 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재현의 단위나 장치를 가리킨다. ‘글쓰기’는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되 재현의 기존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전위적 실험을 의미한다. 이런 전위적 실험의 요구에서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재현은 오로지 재현의 길을 통해만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비로소 ‘보편적 찬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현은 재현 자체를 반복하되 그것의 모든 잠재력이 소진되는 지점까지 끌고 가는 그런 반복의
▲ 프리드리히 셸링     ©

운동 속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 전위적 실험의 결과는 비로소 역사적 계승의 문맥 속에 안착하여 ‘끊임없이 진보하는 문화의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데리다는 칸트주의자이고, 칸트주의자라기보다는 헤겔주의자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글쓰기’란 결국 헤겔식 변증법의 현대적 버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립자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되 일체의 목적론 구도와 획일적 형식성을 탈피한다는 점에서 비-헤겔적이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철학자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것과 똑같이 극단적 심미주의에도 반대한다. 특히 낭만주의는 해체론의 좋은 먹이 감이다. 우리는 낭만주의 예술관을 대변하는 사례로 다음과 같은 셸링의 문장을 들 수 있다.

“미적 직관이 객관적으로 된 초월론적 직관일 따름이라면 다음이 자명해진다. 예술은 철학의 유일하게 참되며 영원한 기관(Organon)인 동시에 자료(Dokument)다. 유일한 기관이자 자료인 예술은 철학이 외적으로 현시(darstellen)할 수 없는 것을 (…) 끊임없이 새롭게 증빙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철학자에게 가장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철학자에게 말하자면 가장 성스러운 곳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자연과 역사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사유에서만이 아니라 삶과 행위에서 영원히 서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성스러운 그곳에서는 마치 하나의 불꽃 속에서처럼 영원하고 근원적인 통일성 속에서 타오른다. (…) 학문의 유년기에 포이에시스로부터 태어나 양육된 철학과 철학을 통해 완전함에 접근한 모든 학문들은 완성 이후, 마치 개별 하천들처럼 그들이 떠났던 일반적인 포이에시스의 바다로 다시 흘러든다.”
- 『초월론적 관념론 체계』 6부 3절 2항

심미주의의 역사적 의미
  테크네와 포이에시스를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던 칸트는 ‘테크네 없는 포이에시스’보다는 ‘포이에시스 없는 테크네’를 더 중시했다. 반면 낭만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반대다. 그 둘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고 심지어 ‘테크네 없는 포이에시스’가 모든 진리의 원천으로 절대화된다. 테크네와 포이에시스가 무관심한 관계에 빠지거나 분리된다는 점이 낭만주의가 보여주는 한 가지 특징이다. 그러나 그 둘의 분리는 낭만주의 속에서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근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먼저 일어났다.
  근대적 세계관은 기계론적 자연관 위에 바탕을 둔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을 기계를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기계론적 자연관이다. 유기체를 비롯한 모든 자연적 현상을 단순한 기계적 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는 세계관 앞에서 고대인이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던 자연은 신비를 잃어버린다. 어떤 거대한 탈마술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탈마술화는 단지 자연의 존재론적 빈곤화만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수반되는 것은 또한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분리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테크네의 패권적 일반화에 의해 포이에시스가 사라지면서 일어나는 분리다. 기계론적 자연관이 이론적으로 심화되면서 살아있는 유기체는 기계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기계가 삶의 영역 일반으로 확산됨에 따라 포이에시스는 테크네로 환원된다. 결국 ‘포이에시스 없는 테크네’만 남는 것이다. 낭만주의와 그것이 옹호하는 극단적 심미주의는 이런 기계론적 환원이 초래한 존재론적 빈곤화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심미주의가 ‘테크네 없는 포이에시스’로 향한다면, 이것은 근대 기술문명이 ‘포이에시스 없는 테크네’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에 의해 탈마술화된 세계를 구제하거나 보상하기 위한 전략이 낭만주의이자 그것이 내세우는 심미주의 세계관이다.
  오늘날의 역사적 현실은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 시대’니 하는 말로 집약되고 있다. 과거의 그 어떤 시대보다 테크네의 패권이 강화될 전망이다. 일상의 세부가, 나아가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일반이 기계에 의해 침투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우리가 예측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지구촌 문명을 장악해 갈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달과 화성으로 정착해 갈 인간의 거주방식으로 자연화될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우주시대에는 자연과 인공 자체의 대립이 무력해질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는 인공의 두 가지 방식인 포이에시스와 테크네의 대립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포이에시스 없는 테크네’든 ‘테크네 없는 포이에시스’든 다 같이 시효가 지난 수표로 전락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테크놀로지 시대를 존재망각이 극치에 이르는 ‘궁핍한 시대’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 궁핍한 시대에 구원의 희망이 자라날 가능성을 횔덜린 같은 낭만주의 시인에게서 찾았다. 테크네가 초래한 가난을 포이에시스의 풍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기계에 대한 탄식과 저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날의 테크놀로지는 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용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테크놀로지 시대라기보다 테크놀로지가 포이에시스로 변형되는 시대다. 미래의 역사는 점점 더 테크네 속에 기입되어 거기서 다시 태어나는 포이에시스에 의해 조형되어 갈 것이다.

■ 미래 예술가에 대한 물음
  이런 미래에 예술가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시인은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철학은 이미 그런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가령 데리다의 해체론은 ‘대리적 보충’의 논리를 통해 그런 내일을 긍정하고 있다. 테크네에 의해 자연이 파괴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보완되어 자신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는 시대를 끌어안는 것이다. 들뢰즈는 더 적극적이다. 테크네에 의해 자연이 빈곤화된다기보다 오히려 우주로 향해 무한대의 범위로 확장되는 시대를 당연시하고, 그것을 ‘우주시대’라 명명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주시대란 테크네가 물, 불, 공기, 흙과 더불어 자연의 제5원소로 자리 잡는 시대다.
  들뢰즈는 이런 시대에 부합하는 존재론을 기계주의(machinisme)라 부른다. 이 기계주의는 데카르트에 의해 창시된 기계론(mécanisme)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기계론이 타성적인 물질과 인과율에 기초한 자연관이라면, 기계주의는 기계적 연결이나 단절 속에 생물학적 활력의 최대 가능성을 기입하는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철학들이 미래 예술 일반에 대한 획일적 지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런 철학들은 적어도 어떤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테크네가 초래한 존재론적 빈곤화를 개탄하거나 기계에 의해 상실된 자연적 순수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인 시대는 이제 옛날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가는 어디에 서서 자신의 ‘먼 곳’을 찾아야 하는가? 짐작건대 그것은 여전히 인간이 맞이해야 할 역사적 운명이나 인간이 지켜야 할 자유를 생각하는 장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근대 예술이 근대인의 직업과 노동에 대한 관념을 완성하는 것은 물론 근대적 자유 개념을 극단적으로 실현한 것처럼 미래 예술 또한 유사한 문제의 장소에서 자신의 ‘먼 곳’을 노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