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대산초대석
이어령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병은 혼자 앓는 것이지만 그럴 수록에 누가 옆에 있어 주기를 원하게 됩니다. 방금 투병(鬪病)이라고 했는데 저는 병과 싸우지 않아요. 그렇다고 병을 다스리는 치병(治病)도 아닙니다. 병을 길들이며 친해지는 친병(親病)입니다. 공연한 말이 아니 에요. 병 자체도 그리고 그 병고(病苦) 자체도 글을 쓰는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 에게는 권력자나 돈 많은 사람처럼 힘은 없지만 남이 갖지 않은 특권이 있지요. 까뮈의 말이 생각나요.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절망 이 끝이에요. 그런데 글 쓰는 사람은 그 절망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한 발자국이 남아 있잖아 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자기는 일찍이 어떤 문학자도 손대지 않은 광 산을 발견했다는 거죠. 병에 대해서 쓸 글이 많다는 겁니다. 남에게는 고통이 그 소설가에게 글 쓰는 노다지였던 겁니다. 나 역시 건강을 잃고 수술을 두 서너 번 하고 나니 안 보이는 것이 보 여요. 그런 것을 글로 남기고 싶어요.
지금 제가 눈을 감으면 영원히 남에게 전달되지 못할 것을 글로 남겨놓으려고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만 알고 있었던 것, 제가 그냥 무덤으로 가지고 가게 되면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 지 않을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희망 말입니다.
- 방 민 호 - 사실, 선생님을 뵙고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문학 연구도 하고, 평론도 쓰고 창작도 합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선생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석사학 위 논문은 전후문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후문학에 나타난 알레고리 수사학에 관해 연구하는 것이었지 요. 전후문학을 새롭게 돌아보니 이어령만큼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비평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게 있 어 이어령을 재인식하는 과정은 전후문학을, 그리고 이상을 만나는 과정이고, 또 정말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이 무엇을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이어령, 이어령 비평이 깊이 있 게 연구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령 내가 연구대상이 된다니 고마우면서도 부끄럽네요. 사실 문학이야말로 영원한 수 작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과 협력해서 글을 쓰거나 동인 활동 같은 것, 또 문학 그룹을 만들 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오히려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릴 때가 많아요. 그래서 천(千) 사람이 떠나도 혼자 앉아 있어야 할 때가 있고, 만(萬) 사람이 앉아 있어도 혼자 떠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고독이고 숙명이라 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문학사나 문예사조사 같은 것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학생들 수능시험용으 로 가끔 나오는 문학사 문제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지요.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등 일 제강점 하에 통틀어 봐야 36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그것도 3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한 글로 글을 발표하지 못했던 시기였잖아요. 개화기 때부터 쳐도 20~30년에 지나지 않는 동시대 인데 문학사가 그렇게 나누어 질 수 있는지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문학사는 카드 정리나 서랍 정리하듯이 분류하는 것이 아니지요. 저의 경우 6·25 전후에 저 항의 문학, 우상의 파괴, 사회참여 같은 것으로 문단에 등장했지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주체적으로 데모를 할 수도 없었어요. 젊은 사람으로서 자기표현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 에 그나마 정치, 경제와는 조금 다르게 숨통이 트여있던 문학 쪽에서 내 시대의 세대를 표현하 려 했지요. 그게 저의 문학의 출발점입니다.
한편 제가 문학을 하는 근거는 항상 언어에 있었습니다. 메타포 연구, 카타르시스 문학론, 기 호와 언어의 세계에 기반을 두는 언어 환경론 같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제가 걸어 온 길을 돌아봤을 때 저에게 문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자연 계가 있고, 사회계가 있고, 그 다른 한쪽에 상징이나 알레고리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기호의 언 어계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한국문학사에 시대 구분을 제너레이션(세대)과 언어 문자와 의 관계로 보고 3세대로 구분해 왔어요. 1세대의 한자문화 세대, 2세대의 일본어 세대(내가 그 곳에 속하지요) 그리고 3세대가 해방 후 태어난 순수한 한글문화 세대입니다. 실제로 제가 책 임 편집으로 편찬한 문학전집인 <제3세대 한국문학>(삼성출판사 刊) 전집이 그렇게 해서 탄생 되지요.
- 방 민 호 - 전후문제 작품집도 편찬하셨지요? 저는 요즘에 1960년대 문학에서 1970년대 문학으로 나 아가는 길목에 관심이 있습니다만.
이어령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입니다. 신구문화사 대표와 데모로 거리 가 소란할 때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새 시대가 온다. 그런데 그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없 다. 금제되었던 전후의 일부 문학 그리고 다른 나라의 새로운 해외문학들도 검열에 걸리고 또 어떤 것은 이중 번역해서 어설픈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제가 책임 편집을 맡아 기획한 것 이 <세계전후문학전집>입니다. 누보로망과 독일의 4·7그룹, 영국의 앵그리 영맨, 미국의 비트 제너레이션 등 전후 세대의 사고 양식과 행동 방식을 그린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수록했지요. 연간으로 나오는 오 헨리 단편상 같은 것도 살펴봤어요. 세계의 유수한 작품들을 전부 직접 읽 고 선정했어요. 해방 직후, 전후에 애들한테 무얼 먹였던가요? 미국 연유를 먹였어요. 우리 애들 한테는 우리가 만든 우유를 먹여 보아야겠다, 우리 애들 체질에 맞는 것을 해 봐야겠다, 그게 우리에 필요한, <세계전후문학전집>이었어요. 마케팅, 광고문구, 잡지 장정까지 도맡다시피 했어 요. 소위 7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한국문인들에게 공통으로 영향을 준 책이 전후 문제 작품이었던 거죠. 문학사상의 주간을 하게 된 것도 ‘문단’이 아니라 직접 독자를 문학의 텃밭으로 만들 고자 한 것이고요.
- 방 민 호 - 《문학사상》은, 마치 일제 말기에 《문장》과 《인문평론》 말고 학예사가 있었듯이, 창비와 문 지 말고 제3의 문학잡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학사의 갈림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 기회가 있기를 바라야 하겠습니다. 아까 죽음에 대한 성찰의 말씀을 뜻 깊게 들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이신데요. 그런 와중입니다만 어떤 작업들을 하고 계신지요?
이어령 우리나라의 비평 풍토는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작품론보다는 작가론, 그 배 경인 시대성과 사회성을 분석하는 외재적 비평이 주류를 이루어왔어요. 제가 문학비평에서, 또 는 대학 강단에서 해 온 것은 기호학과 그것을 응용한 작품의 실
제 독해를 통한 텍스트 구조 분석의 내재적 방법이었지요. 가령 「메밀꽃 필 무렵」처럼 이제는 관광 상품이 된 작품인데도 실 제 그 작품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요. 작품에 대한 해석이라고 해도 허생원이 왜 보부상이냐 하는 것에 일제강 점 하의 시대적 사회상에 초점을 둔 것이어 서 당시 조선총독부의 토지 정책으로 농지 를 빼앗긴 농민들은 보부상이 될 수밖에 없 었다 하는 식이지요. 통계숫자로도 드러나 는 이러한 사실들은 설득력이 있고 확실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어서 나무랄 데가 없습 니다.
하지만 실제 그 작품을 읽는 데는 큰 도 움이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허생원이 장돌 뱅이가 된 것은 그가 메밀꽃 필 무렵 밤중 에 사랑을 나눈 성처녀를 만나려는 것과 더 관련성이 깊습니다. 성처녀를 만날 확률은 장꾼을 상대로 한 보부상이 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도 또는 허구적인 스토리 상에서도…… 그러니까 그 서 사 구조도 “찾다”가 핵심이고 그 소 설의 끝은 “찾았다”입니다. 소설의 서 사구조에는 텔레마코스의 아버지 찾 기나,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이 누군 가를 찾는 그런 유형이 많습니다. 동 이가 역시 장돌뱅이가 된 것도 아버 지 찾기가 그 목적이고, 결국은 그들 이 장을 찾아다니는 보부상이기에 만날 수 있게 된 거지요. 뿐만 아닙 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는 성처녀와 의 남녀관계 구조,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구조, 성처녀 이야기를 하는 이 야기 구조, 이렇게 인간의 3대 교환 인 육체를 통한 성적 교환, 돈을 통 한 상품 교환, 그리고 언어를 통한 이 야기의 교환 구조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낮과 밤으로 이야 기는 대칭 구조를 이루지요. 낮에는 불행한 허생원이 밤에는 행복한 허생원으로 대칭을 이룹니 다. 그것이 해의 텍스트와 달의 텍스트지요.
그래서 나의 버킷 리스트는 지금까지 미완성으로 있었던 대학에서 강의한 신라 향가에서 김 승옥의 「무진기행」까지 미완성의 연구물들을 모은 작품들을 분석하는 작업입니다. 내가 세상 을 떠난 뒤에도 이 작업은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던 후학들, 그리고 작품 분석에 관심을 가진 비평가들이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방 교수와 같은 유능한 후학 이 있으니까요! 이것이 실현되면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그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지요.
- 방 민 호 -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문명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가져 오셨습니다. 요즈음에도 디지로 그 같은 합성적 개념이나 인공지능 같은 미래적 양상에 대해 관심이 깊으신데요.
이어령 인류는 지금까지 네 개의 단계를 거쳐 왔어요. 수렵채집시대, 농경시대, 산업시대, 정보화시대. 정보화시대 그 다음엔 뭐가 오고 있을까요? 생명시대, 곧 생명화가 옵니다. 그래서 생명자본주의에 관해 썼습니다. 지금 정보화시대라고들 하지요. 정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개구리는 정보를 알아야 얼어 죽지 않습니다. 겨울이 오는 정보를 알아야 땅 구멍에 들어가지 요. 봄이 오는 정보를 알아야 땅에서 기어 나옵니다. 이렇듯 살아있는 자에게 정보는 생명입니 다. 돌멩이는 정보 없어도 되지요. 0도가 되면 그냥 얼면 되는 거죠. 물은 100도 되면 끓으면 됩 니다.그러나 송사리 한 마리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압니다. 이게 살아 있는 거지요.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요, 죽
어 있는 것은 물에 떠내려가면 그만이지만. 달 나라에 정보라는 건 없습니다. 해 나라에 정보 없습니다. 현상이 있을 뿐이지요. 유일하게 생명 을 가진 지구에만 정보가 있습니다. 빅 데이터 의 시대가 왔습니다. 놀라운 세계가 오고 있는 거지요. AI가 정보가 되고, 정보가 의료기술로 왔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 혜를 갖추면 이 정보의 시대가 생명을 향해 거 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인류의 탄생부터 수렵채 집의 시대에서 발원하여 데이터, 정보의 시대까 지 온 것을 거꾸로 유턴해서 올라가 다시 생명 의 시대로 가야 하는 거지요.
- 방 민 호 - 오늘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어령 언제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 고 만납시다, 우리.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이어령 선생과의 만남
글 방민호 ㅣ 평론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5년생
평론집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행인의 독법』 『납함 아래의침묵』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소설『연인 심청』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 등
이어령 ㅣ 평론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1934년생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 물결』 『통금시대의 문학』,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젊음의 탄생』 『디지로그』 『지성에서 영성으로』 『하이쿠의 시학』 『공간기호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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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이어령 선생과의 만남 |
- 방 민 호 - 선생님 안녕하세요.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말 듣고 걱정이 큽니다. 강연도 인터뷰도 투병 중이시라서 사양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저희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어령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병은 혼자 앓는 것이지만 그럴 수록에 누가 옆에 있어 주기를 원하게 됩니다. 방금 투병(鬪病)이라고 했는데 저는 병과 싸우지 않아요. 그렇다고 병을 다스리는 치병(治病)도 아닙니다. 병을 길들이며 친해지는 친병(親病)입니다. 공연한 말이 아니 에요. 병 자체도 그리고 그 병고(病苦) 자체도 글을 쓰는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 에게는 권력자나 돈 많은 사람처럼 힘은 없지만 남이 갖지 않은 특권이 있지요. 까뮈의 말이 생각나요.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절망 이 끝이에요. 그런데 글 쓰는 사람은 그 절망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한 발자국이 남아 있잖아 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자기는 일찍이 어떤 문학자도 손대지 않은 광 산을 발견했다는 거죠. 병에 대해서 쓸 글이 많다는 겁니다. 남에게는 고통이 그 소설가에게 글 쓰는 노다지였던 겁니다. 나 역시 건강을 잃고 수술을 두 서너 번 하고 나니 안 보이는 것이 보 여요. 그런 것을 글로 남기고 싶어요.
지금 제가 눈을 감으면 영원히 남에게 전달되지 못할 것을 글로 남겨놓으려고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만 알고 있었던 것, 제가 그냥 무덤으로 가지고 가게 되면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 지 않을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희망 말입니다.
- 방 민 호 - 사실, 선생님을 뵙고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문학 연구도 하고, 평론도 쓰고 창작도 합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선생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석사학 위 논문은 전후문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후문학에 나타난 알레고리 수사학에 관해 연구하는 것이었지 요. 전후문학을 새롭게 돌아보니 이어령만큼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비평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게 있 어 이어령을 재인식하는 과정은 전후문학을, 그리고 이상을 만나는 과정이고, 또 정말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이 무엇을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이어령, 이어령 비평이 깊이 있 게 연구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령 내가 연구대상이 된다니 고마우면서도 부끄럽네요. 사실 문학이야말로 영원한 수 작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과 협력해서 글을 쓰거나 동인 활동 같은 것, 또 문학 그룹을 만들 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오히려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릴 때가 많아요. 그래서 천(千) 사람이 떠나도 혼자 앉아 있어야 할 때가 있고, 만(萬) 사람이 앉아 있어도 혼자 떠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고독이고 숙명이라 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문학사나 문예사조사 같은 것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학생들 수능시험용으 로 가끔 나오는 문학사 문제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지요.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등 일 제강점 하에 통틀어 봐야 36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그것도 3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한 글로 글을 발표하지 못했던 시기였잖아요. 개화기 때부터 쳐도 20~30년에 지나지 않는 동시대 인데 문학사가 그렇게 나누어 질 수 있는지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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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는 카드 정리나 서랍 정리하듯이 분류하는 것이 아니지요. 저의 경우 6·25 전후에 저 항의 문학, 우상의 파괴, 사회참여 같은 것으로 문단에 등장했지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주체적으로 데모를 할 수도 없었어요. 젊은 사람으로서 자기표현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 에 그나마 정치, 경제와는 조금 다르게 숨통이 트여있던 문학 쪽에서 내 시대의 세대를 표현하 려 했지요. 그게 저의 문학의 출발점입니다.
한편 제가 문학을 하는 근거는 항상 언어에 있었습니다. 메타포 연구, 카타르시스 문학론, 기 호와 언어의 세계에 기반을 두는 언어 환경론 같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제가 걸어 온 길을 돌아봤을 때 저에게 문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자연 계가 있고, 사회계가 있고, 그 다른 한쪽에 상징이나 알레고리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기호의 언 어계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한국문학사에 시대 구분을 제너레이션(세대)과 언어 문자와 의 관계로 보고 3세대로 구분해 왔어요. 1세대의 한자문화 세대, 2세대의 일본어 세대(내가 그 곳에 속하지요) 그리고 3세대가 해방 후 태어난 순수한 한글문화 세대입니다. 실제로 제가 책 임 편집으로 편찬한 문학전집인 <제3세대 한국문학>(삼성출판사 刊) 전집이 그렇게 해서 탄생 되지요.
- 방 민 호 - 전후문제 작품집도 편찬하셨지요? 저는 요즘에 1960년대 문학에서 1970년대 문학으로 나 아가는 길목에 관심이 있습니다만.
이어령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입니다. 신구문화사 대표와 데모로 거리 가 소란할 때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새 시대가 온다. 그런데 그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없 다. 금제되었던 전후의 일부 문학 그리고 다른 나라의 새로운 해외문학들도 검열에 걸리고 또 어떤 것은 이중 번역해서 어설픈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제가 책임 편집을 맡아 기획한 것 이 <세계전후문학전집>입니다. 누보로망과 독일의 4·7그룹, 영국의 앵그리 영맨, 미국의 비트 제너레이션 등 전후 세대의 사고 양식과 행동 방식을 그린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수록했지요. 연간으로 나오는 오 헨리 단편상 같은 것도 살펴봤어요. 세계의 유수한 작품들을 전부 직접 읽 고 선정했어요. 해방 직후, 전후에 애들한테 무얼 먹였던가요? 미국 연유를 먹였어요. 우리 애들 한테는 우리가 만든 우유를 먹여 보아야겠다, 우리 애들 체질에 맞는 것을 해 봐야겠다, 그게 우리에 필요한, <세계전후문학전집>이었어요. 마케팅, 광고문구, 잡지 장정까지 도맡다시피 했어 요. 소위 7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한국문인들에게 공통으로 영향을 준 책이 전후 문제 작품이었던 거죠. 문학사상의 주간을 하게 된 것도 ‘문단’이 아니라 직접 독자를 문학의 텃밭으로 만들 고자 한 것이고요.
- 방 민 호 - 《문학사상》은, 마치 일제 말기에 《문장》과 《인문평론》 말고 학예사가 있었듯이, 창비와 문 지 말고 제3의 문학잡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학사의 갈림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 기회가 있기를 바라야 하겠습니다. 아까 죽음에 대한 성찰의 말씀을 뜻 깊게 들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이신데요. 그런 와중입니다만 어떤 작업들을 하고 계신지요?
이어령 우리나라의 비평 풍토는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작품론보다는 작가론, 그 배 경인 시대성과 사회성을 분석하는 외재적 비평이 주류를 이루어왔어요. 제가 문학비평에서, 또 는 대학 강단에서 해 온 것은 기호학과 그것을 응용한 작품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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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독해를 통한 텍스트 구조 분석의 내재적 방법이었지요. 가령 「메밀꽃 필 무렵」처럼 이제는 관광 상품이 된 작품인데도 실 제 그 작품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요. 작품에 대한 해석이라고 해도 허생원이 왜 보부상이냐 하는 것에 일제강 점 하의 시대적 사회상에 초점을 둔 것이어 서 당시 조선총독부의 토지 정책으로 농지 를 빼앗긴 농민들은 보부상이 될 수밖에 없 었다 하는 식이지요. 통계숫자로도 드러나 는 이러한 사실들은 설득력이 있고 확실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어서 나무랄 데가 없습 니다.
하지만 실제 그 작품을 읽는 데는 큰 도 움이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허생원이 장돌 뱅이가 된 것은 그가 메밀꽃 필 무렵 밤중 에 사랑을 나눈 성처녀를 만나려는 것과 더 관련성이 깊습니다. 성처녀를 만날 확률은 장꾼을 상대로 한 보부상이 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도 또는 허구적인 스토리 상에서도…… 그러니까 그 서 사 구조도 “찾다”가 핵심이고 그 소 설의 끝은 “찾았다”입니다. 소설의 서 사구조에는 텔레마코스의 아버지 찾 기나,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이 누군 가를 찾는 그런 유형이 많습니다. 동 이가 역시 장돌뱅이가 된 것도 아버 지 찾기가 그 목적이고, 결국은 그들 이 장을 찾아다니는 보부상이기에 만날 수 있게 된 거지요. 뿐만 아닙 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는 성처녀와 의 남녀관계 구조,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구조, 성처녀 이야기를 하는 이 야기 구조, 이렇게 인간의 3대 교환 인 육체를 통한 성적 교환, 돈을 통 한 상품 교환, 그리고 언어를 통한 이 야기의 교환 구조가 모두 갖추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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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그리고 낮과 밤으로 이야 기는 대칭 구조를 이루지요. 낮에는 불행한 허생원이 밤에는 행복한 허생원으로 대칭을 이룹니 다. 그것이 해의 텍스트와 달의 텍스트지요.
그래서 나의 버킷 리스트는 지금까지 미완성으로 있었던 대학에서 강의한 신라 향가에서 김 승옥의 「무진기행」까지 미완성의 연구물들을 모은 작품들을 분석하는 작업입니다. 내가 세상 을 떠난 뒤에도 이 작업은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던 후학들, 그리고 작품 분석에 관심을 가진 비평가들이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방 교수와 같은 유능한 후학 이 있으니까요! 이것이 실현되면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그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지요.
- 방 민 호 -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문명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가져 오셨습니다. 요즈음에도 디지로 그 같은 합성적 개념이나 인공지능 같은 미래적 양상에 대해 관심이 깊으신데요.
이어령 인류는 지금까지 네 개의 단계를 거쳐 왔어요. 수렵채집시대, 농경시대, 산업시대, 정보화시대. 정보화시대 그 다음엔 뭐가 오고 있을까요? 생명시대, 곧 생명화가 옵니다. 그래서 생명자본주의에 관해 썼습니다. 지금 정보화시대라고들 하지요. 정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개구리는 정보를 알아야 얼어 죽지 않습니다. 겨울이 오는 정보를 알아야 땅 구멍에 들어가지 요. 봄이 오는 정보를 알아야 땅에서 기어 나옵니다. 이렇듯 살아있는 자에게 정보는 생명입니 다. 돌멩이는 정보 없어도 되지요. 0도가 되면 그냥 얼면 되는 거죠. 물은 100도 되면 끓으면 됩 니다.그러나 송사리 한 마리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압니다. 이게 살아 있는 거지요.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요,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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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는 것은 물에 떠내려가면 그만이지만. 달 나라에 정보라는 건 없습니다. 해 나라에 정보 없습니다. 현상이 있을 뿐이지요. 유일하게 생명 을 가진 지구에만 정보가 있습니다. 빅 데이터 의 시대가 왔습니다. 놀라운 세계가 오고 있는 거지요. AI가 정보가 되고, 정보가 의료기술로 왔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 혜를 갖추면 이 정보의 시대가 생명을 향해 거 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인류의 탄생부터 수렵채 집의 시대에서 발원하여 데이터, 정보의 시대까 지 온 것을 거꾸로 유턴해서 올라가 다시 생명 의 시대로 가야 하는 거지요.
- 방 민 호 - 오늘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어령 언제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 고 만납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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